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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관측후일지

프롤로그부터 새로 쓰고 있으니 읽어주세요!

리뉴얼 업데이트 현황: 프롤로그 ● / 에피소드 1 / 에피소드 2 ○○


<甲>


어둑어둑한 시간은 아니었으나, 하루를 마감하기에는 충분한 시각이었다. 서지원(徐地園)은 그 날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도 관직도 알 수 없었던 그가 찾아왔던 날 밤의 일.

그의 행동거지는 그럭저럭 선비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으나, 차림새는 거지꼴을 한 채였다. 그는 여태껏 지원이 보았던 다른 환자들과 같이 예고 없이 지원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말했다.

"조선 팔도에서 가장 뛰어난 의술을 가진 의원이 얼마 전 상경했다 하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하하, 그리 들으셨습니까?"

지원으로서는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서지원은 어떤 사정으로 인해 지난 십수년 간 도성에 발도 붙이지 못했다. 그러나 지원에 대한 소문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의술은 이미 나라에서 제일가는 것이었기에. 상경하자마자 지원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이들에 의해 집을 방문하는 사람은 끊이지 않았다.

상대는 지원의 말에 답하기보다는 한 술 더 떴다. 어디에서도 들어 본 적 없는 소문.

"듣자하니, 사람의 운명마저 고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분이라고…."

"글쎄요. 제가 말입니까."

지원은 허허 웃으며 가볍게 농을 받아들였지만, 그런 농을 던진 사람치고 상대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乙>


관상감 교수 방정식(方貞識)은 제 방에 멍하니 앉아 열려 있는 문 밖으로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인왕산 동쪽 산기슭의 집. 이른 저녁에도 태양은 이미 산 반대편으로 넘어가고, 남아 있는 빛줄기조차도 동쪽으로만 열려 있는 이 집으로는 들어오지 않는다. 산세를 따라 구불구불 자리를 잡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후."

정식은 한숨을 한 번 푹 내쉬었다. 평소와 달리 이런저런 잡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그 날따라 영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초조한 표정을 하고서는 그는 대문 밖을 서성이는 한 그림자로 시선을 옮겼다.

"…음?"

정식의 집은 험한 산 중턱에 걸쳐 있었기에 이 시각에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자주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딱히 이렇다 할 기억이 없는 그림자가 밖에서 서성이는 것이었다. 정식은 그제서야 그 형체의 거동이 쓰러질 듯 말 듯하게 불안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의문을 거두지 못하며 정식은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나가 그에게 다가갔다.

"…이보게…? 무슨 일인가."

"…!"

정식이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 그 앞에 쓰러지다시피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이는 열대여섯 살 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었다.

"저어, 나으리께서 방정식 교수십니까."

"그렇네만, 역시 날 찾아온 겐가."

아이는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내 이름과 거처는 어찌 알았고?"

아이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고민을 하는 눈치를 보이다가 고개를 약간 숙이면서 중얼거렸다.

"…듣기로는, 아무 연줄 없는 사람이 관상감 생도로 들어가려면…. 인왕산 동쪽 기슭의 제일 높은 집을 찾아가 보라고…."

흐려지는 말끝. 이렇게 찾아와서는 자신을 보자마자 하는 말이 여러 절차를 무시하고 자신을 생도로 넣어 달라는 것이라니.

"하….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은 어디서 퍼진 겐지. "


<甲>


서지원은 표정을 고쳐먹고 제 앞의 상대에게 물었다.

"그래서, 결국 어떤 병 때문에 오셨습니까.''

이 사람도 겉보기엔 병이 많아 보였지만, 본인 때문에 온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상대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보였다.

"…제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제 남은 재산을 털어, 돈은 충분히 드릴 테니 말입니다."

남은 재산이 얼마나 될는지, 충분이라는 것은 또 얼마인지. 지원으로선 알 수 없었다. 병엔 경중이 있다. 해마다 추워지기 시작하면 거의 모두가 한 번쯤은 앓고 지나갈 고뿔 같은 병과 당장 오늘조차 살아남는 것이 벅찬 죽을병은 다르다. 따라서 모든 이들에게 같은 값을 받지는 않는 것이다. 모두가 그 정도는 안다.

상대가 저리 말을 하는 이유는 둘 중 하나. 아이의 병세가 심각하거나, 돈이 없거나일 것이다. 이미 몇십 년 째 이 땅에서 의원 일을 해 왔기에 이런 이들을 꽤나 자주 봐 왔던 서지원이었다. 지원이 이런 상황을 마주친 경우 으레 하는 말이 있다.

"자, 일단은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갑시다. 고칠 수 있을지 어떨지 한 번 본 이후에 이야기하지요. 만약 어렵다면 대가는 받지 않을 겁니다."

지원은 언제나처럼 미소와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아닙니다. 그래도 값은 먼저 치루어야지요. 그 애에게 적어도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의원에게 널 맡겼었다, 는 변명 정도는 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까.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지원은 하던 설득을 이어가려 했다.

그 순간, 상대가 다 떨어져 가는 제 소매에서 동전들을 털어 부었다. 바닥과 금속이,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여러 번 굵게 울려퍼졌다. 거절하기엔 너무 큰 액수였다.


<乙>


정식의 말을 듣고는 아이의 표정이 금방 어두워졌다. 얼굴조차 모르는 녀석이었다.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식은 고민했다. 이런 상황 하나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약해빠진 자신의 마음을 내심 원망하면서 정식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당장 이번 식년시에 응시해야만 합니다."

음양과 천문학 시험은 본래 생도들 외에는 응시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과거를 보는 것이 목적이라면 견습도 아닌 정규 생도로서 입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긴 해도, 내가 무슨 이유로 이름도 모르는 자넬 입속시키려고 목숨을 걸겠는가?"

그 아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그를 조건 없이 보증해 주기는 어려웠다. 만약 나중에라도 무엇이든 그에 관한 정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밝혀질 때 그에 대한 것을 정식이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부탁드립니다. 도와 주십시오."

아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식은 어떻게든 상황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머리를 굴려 이리저리 변명할 거리를 찾았다.

그래, 애초에 지금으로선 저 녀석은 생도로 들어갈 수 없다. 빈 자리가 없는 탓이다.

"그렇지…. 사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네. 법전에 명시된 생도의 정원이란 게 있거든. 그러니 내 말은, 지금은 생도 마흔 명이 다 채워져 있단 말이야."

관상감 천문학 생도의 정원은 마흔 명. 그리고 현재 그 자리들은 모두 채워져 있는 상태였다. 아마 지금대로라면 일러야 식년시가 끝나고 나서야 새로 자리가 생길 게다. 그렇게 되면 아이가 찾아온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됨이 확실했다. 대충 구슬린다면 저 아이도 금방 돌아가지 않으려나. 허나 그 예상은 빗나가 버렸다.

"어,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법이란 것도 필요에 의해 여러 번 바뀌어 오지 않았습니까."

아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더 어려운 일이니,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군. 정식은 제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좋지 않은 느낌은 이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이리도 피곤한 밤이 전에 또 있었던가.

- 까악, 까악.

까마귀 소리가 그 틈에 마당 너머로 울려퍼졌다. 저 녀석은 이 소리가 무섭지도 않은가. 어두운 밤이 무섭지도 않은가.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가.


<甲>


"이것 말고, 곳간에 남은 거라도 찾아보면 더 있을 겁니다. 그래도 부족하다면 집이라도 팔아…."

이미 그가 가지고 온 것만으로도 아무리 큰 병을 가진 사람에게도 한 번도 요구해 본 적 없고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돈이었다. 서지원은 애써 그 큰 액수에서 자신의 눈을 떼며 상대의 부탁을 거절하려 했다.

"그,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렇게 많은 돈을 한 번에 받아 본 적 또한 없습니다. 그러니 어떤 병이든 고치는 값으로는 충분할 겁니다. 이제 댁으로 갑시다. 보아하니 아이의 병이 깊은 듯한데, 진단이 빠를수록 좋지요."

그 순간, 상대의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떨어져 내렸다.

"의원님께서, …몇 년만 일찍 도성에 돌아오셨다면 좋았을 텐데."

두 뺨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그냥 둔 채로 그가 말했다.

"그야 그렇겠지요. 그래도 괜찮을 겁니다."

서지원은 한숨을 쉬며, 일단 상대를 안심시켰다. 괜찮을 거라는 빈말 섞인 답을 했다. 이제는 그런 말을 해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평소대로였다.

"…글쎄요."

그리 대답한 상대는 일어나 아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앞서 가는 그의 거처가 조금 멀다고 생각했다. 사대문 밖에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표정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도성에 돌아오고 말고가 애초에 무슨 상관이었냐며 따져묻고 싶을 정도였다.

민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작은 풀밭에 당도하기 전까지는.

둘의 눈 앞에 있었던 것은 비석조차 세우지 않은 작고 초라한 무덤이었다.


<乙>


"나으리! 방 교수 나으리!"

진수가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버티기 시작한 지 채 일 각(약 15분에 해당함)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멀리서 발자국 소리와 함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 무슨 이상한 날인가. 다른 날 같지 않은 일들이 이미 여럿 겹쳤다. 평소였다면 슬슬 여유 있게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을 시각이었다. 정식이 그리 생각하고 있을 동안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한 관원이 대문 안쪽으로 뛰어들어왔다. 정식은 얼굴만 아는 이였다. 아마도 과거를 거치지 않고 입속해 온 자 중 하나일 게다.

"그 생도 일입니다. 전에 말씀하셨던 그 분!"

그 말을 전하러 온 관원의 표정과 말투가 이미 모든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정식의 표정은 점차 굳어 갔다. 어쩐지 아까부터 불안한 기운이 스며오더라니.

"한강 가에서 몸을 던졌답니다!"

"뭐, 뭐라고…."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식은 말 없이 무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그는 찾아온 관원에게 다른 것을 묻지 않았다.

반 각 정도의 시간이었건만, 평소의 몇 배의 속도로 훌쩍 지나간 듯 했다. 비보를 전해 준 관원은 그 사이 제 집으로 돌아갔다. 아니, 다시 현장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정식은 어떻게든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아까 저를 찾아왔던 그 아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만 자네도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어떠한가."


<甲>


서지원은 눈앞을 의심했다. 이 상황에서 상대가 요구할 만한 건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탁해도, 나라 전체를 통째로 준다고 해도 불가능한 것이 있다.

"…아이를 살려달라 했던 게, 그런 의미였습니까."

내가 잘못 걸렸구나. 지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더 이상은 애써 친절하게 대할 이유도 없을 게다. 여기까지 이 사람을 따라오느라 고생하기도 했고. 지원은 상대에게 보이도록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허나 더 이상 찾아오지 마십시오."

단호하게 말하고는 자리를 정리했다. 상대가 급하게 지원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저…."

울음 섞인 목소리에 안쓰러움을 느낀 지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을 무시하고 돌아간다면 저 사람도 이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저 사람의 마음이라도 돌려서 살려 보냄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튀어나온 말은 의외로 상식적인 것이었다.

"아무리 의원이라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는 걸 압니다. 제가 그 정도도 분간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

그 대신 그는 서지원에게 말했다.

"아까 한 말, 있지 않습니까."

그게 어떤 말이었지. 기억은 가물가물했으나 적어도 지원의 심장에 와닿았던 한 마디가 있었다.

'적어도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의원에게 너를 맡겼었다.'

그게 그가 늦게라도 서지원을 찾아온 이유였다.


<乙>


"집으로 다시 돌아가라니요. 전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 동안 마당에 점차 어둠이 내려 아까보다 훨씬 희미하고 어둡게 보이는 아이의 표정은 정식 자신보다도 무덤덤하고 단호했다.

"방금 그런 일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마음을 바꾸지 않은 겐가."

"아까는 자리가 없기에 저의 입속이 불가능하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정식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 이 자가 무슨 말을.

"뭐, 뭣이."

"방금, 그 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분으로 인해 결원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제가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떨리는 말투, 올라간 입꼬리. 아이의 표정에선 어떠한 걱정도, 두려움도, 동정도, 안타까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기 바로 앞에서 뻔히 다 보았으면서, 정식의 표정, 몸짓,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까지도 다 지켜보았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에서 나오는 미세한 밝은 기운이 정식의 눈동자를 눈부시게, 아니 불쾌하게 덮었다.

어떻게든 다시 돌려보내고 싶었다. 녀석과 계속 마주하는 것을 정식으로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었다. 뭔가 다른 구실이 필요했다. 머리가 더는 돌아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창과 화살이 관자놀이를 계속 찔러대었다.

"무섭지 않나. 저렇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거, 방금 알지 않았나."

아, 고작 이것인가.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아이의 표정은 바뀌었다. 더는 웃는 낯은 찾아볼 수 없이 사뭇 진지했다. 이상하게도 그것을 계속 들여다보는 정식의 마음 또한 잔잔해졌다.

"전, 만물의 이치(物理)를 깨닫고 싶을 뿐입니다."

말이란 얼마나 쉬운 것인가. 그간 얼마나 많은 이에게서 이와 비슷한 말을 들었던가. 관상감에 생도로 입속하려는 이는, 아니 전 현직 관원을 막론하고 살면서 명분 챙길 때가 되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하게 되는 말이었다. 아무리 그 삶이 만물의 이치는 고사하고 그저 몇백 년 전의 방식을 따라 주어진 대로 성변을 측후하고 칠정의 운행을 추산하는 단순하다면 단순한 일만을 반복해 왔다고 해도.

그러나 그의 다음 말이 정식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지 못하는 저의 삶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삶에 목숨 건다는 말은 그리 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가 어떤 인생을 살아 왔기에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인가. 마음이 쓸 데 없이 넓은 것이 문제라고 오랜 벗은 자주 이야기를 해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네 이름이 뭔가."

정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전과 같은 미소를 보였다.

"…보배 진 자에 빼어날 수 자를 쓰는 이진수(李珍秀)라 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발이 꽤나 넓은 정식이 얼굴도 본 적 없고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라니 정말 연줄이라곤 하나도 없는 아이인 듯 했다. 살아남기는 힘들겠군 그래. 정식은 씁쓸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가, 먹을 갈아 작은 종이에 정돈되지 않은 작은 글자로 서너 줄 정도를 적어 진수의 손에 올려 주었다. 입속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었다.

"여기 있는 대로 빠짐없이 챙겨, 준비되면 다시 찾아오게. 다음엔 이런 야심한 시각에 찾아오진 말고."

"아, 알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난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하겠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식은 몸을 돌려,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참았던 눈물이 조금씩 흘렀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정식은 방 안에서 이불을 가지런히 펴고 가만히 누웠다. 몇 날 며칠을 그렇게 기다려도 끝까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여파로, 피곤이 정식의 이마를 무겁게 짓눌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식은 결국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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