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壹_朔

서운관측후일지

그것은, 진수에 대한 유한의 추측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 반가의 자식입니까?"

정식의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 채로 그가 물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유한아."

정식이 유한을 나즈막히 불렀다.

"넌 이미 머릿속으로 답을 내고 묻는 게지. 지금까지처럼. 그렇지 않으냐."

"…스승님께서도 알지 않습니까. 제가 아무리 정확한 답을 낸다 한들, 저는 제 답에 대한 확신이 없어 항상 스승님을 졸라 확인받곤 했었습니다."

정식은 거기서 한숨을 내어쉴 수밖에 없었다. 저 놈이 과거를 치르고 일을 맡게 된 지 벌써 4년차에 접어들었는데, 아직도 그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던 것인가. 그것이 단지 유한의 지금 심경을 설명하는 비유와 같은 것이라 해도, 그가 거기에 매인 채 고립되어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것이었고, 그건 정식 스스로에게 있어서도, 제 교육 방식에 대해 재고해 볼 계기가 될 만한 것이었으니.

"그래서 지금 네가 하는 일도, 일일이 상관들에게 확인받곤 하느냐."

"그건 아니지만, 이건…."

어찌 되었든, 정식 역시 지금은 사실을 알려 줄 때도 되었다 생각했다. 중요한 것도 아니거니와, 너무 뜸을 들였던 게다. 그러니 유한의 떨리는 목소리에 답을 해 줄 필요가 있다 여겼다.

"그래. 맞다."

이에 유한이 정식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피부를 스치던 불안감이 살을 파고들어왔다. 정식은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로 말을 계속했다.

"만약 네 말이 틀렸다면 내가 그리 말했겠나. 하여튼 이 놈의 성정이 문제구나. 네게는 뭘 얘기하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좋다고 항상 생각하는데도."

"스승님, 그 말은."

유한이 그리도 초조한 표정으로 정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일 년 여 전에 사람을 찾는단 소문이 여기저기 돌고 있었던 걸 기억하니. 그게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졌지 않으냐."

분명 그랬다. 분명 반가의 자식이나, 그를 적극적으로 찾아다녔던 단 몇 명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들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병판 대감에게 신유년생 , 그러니까 올해 열 여덟 살 된 자식이 있는데, 그가 현재 행방불명 상태이다.'


한 번 돌긴 했지만, 너무나도 일순간에 사라져, 보는 이들 역시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 없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소문인 양 받아들였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고. 유한도 그렇게만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 사람이, 그 아이와 같은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유한은 그 아이 라는 가벼운 표현이 입 밖으로 새어나가자마자 화들짝 놀라 입을 가리며 사실 여부를 물었다. 전혀 상상한 적도 없는 일, 게다가 유한은 그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몰랐었다. 그런 유한에게 정식은 달리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평소 하던 대로 아무 말 없이 유한의 등을 토닥이는 것뿐. 유한은 말없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혹은 마치 속으로 가만히 분을 삭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그 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 그래 봤자 삼, 사일 정도가 겨우 흐른 - 날 아침, 생지옥이나 다름없던 면신례를 거친 진수와 윤구를 비롯한 다섯 명은 처참한 몰골로 겨우 제시간에 등청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 중에서도 진수는 거의 혼이 빠져나간 모양새를 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워낙 마르고 약한 체질이기도 했으나, 남의 비위 맞추고 분위기에 녹아드는 것에 서투른 성정이기 때문임이 더 컸으리라. 체격은 비슷해 보이지만 성격만큼은 조금 더 유한 효민이 멀쩡히 등청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면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진수가 괴로운 표정을 하며 나머지 넷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들에게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그는 바로 뒤돌아 느린 걸음으로 삼력청으로 향했다. 뒤에서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윤구는 그런 진수를 보자마자 놀란 토끼눈을 하며 뒤돌아 꾸벅 목례를 하고는 진수를 따라갔다.

"이봐, 경호! 같이 가세."

"에…."

진수가 못이기는 듯 대답했다. 윤구는 그 뒤로 바짝 따라붙어 친근하게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리고는 귀에 입을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면신례 때, 내가 시킨 대로 원 관원 나리와 이야기는 잘 했었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가만히 끄덕끄덕.

"대답 좀 하게. 그래야 내가 자넬 도울 거 아니야."

이런 말들을 늘어놓으며 윤구는 입 여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진수에게서 대답을 재촉했다. 대답이라고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는 그를 보며 점차 김 빠진 표정으로 변해 가고는 있었지만.

그런 사이에 이미 둘은 삼력청 앞에 당도해 있었다. 진수가 한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는 윤구 쪽으로 가만히 목례를 했다.

"그래, 들어가게. 난 이 앞에서 원 관원 나리를 기다려야 한대서."

윤구가 안쓰러운 듯 인사를 건넸다. 진수는 그걸 받는 듯 마는 듯 다시 한 번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문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그 안에는 역시나, 유한만이 전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

유한은 아는 척조차 없이 뚱한 표정으로 진수 쪽을 보고 있었다. 어딘가 퉁명스런 시선으로 느껴져 진수는 소름 돋은 표정으로 유한을 돌아보았다.

"궈, 권지 어른?"

진수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유한은 바로 고개를 푹 숙이고는 일에 열중하는 듯 한 태도를 보였다. 우연의 일치려나, 별 신경 안 써도 되겠지, 하며 진수는 전에와 같이 유한의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으음…."

유한이 헛기침을 하며 슬쩍 각도를 틀었다.

"…무슨 일 있으신 거지요? 분명."

진수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유한은 진수와 마주보지 않으려는 셈인지 고개를 떨구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미안한데…."

그리고는 빠르게 일어나 바깥으로 내달리면서, 마지막 인사인 듯 소리치는 것이었다.

"…더는 말 걸지 말아 주게!"

여태까지 본 유한의 모습 중 가장 재빠른 행동에 진수는 그저 그런 유한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이상함을 느끼고 당장이라도 유한을 따라가 그의 행방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조금 뒤의 일. 진수는 가만히 몸을 일으켜 유한을 찾기 시작했다.

*

예상대로,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삼력청 뒤로 돌아가 찾아보니, 숨거나 다른 방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계단 위에 앉아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고 있는 유한이 보였다. 그는 매우 초조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진수는 비록 그걸 눈치채지는 못했으나 어딘가 심상찮은 분위기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진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결심이 선 듯 유한을 향해 다가가며 말을 걸려 했다. 그러나 인기척을 느낀 유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고 거기, 딱 거기에 있어 주면 안 되겠나."

이미 다 포기한 듯한 말투였다.

"역시, 스승님께 말씀드려야겠어. 자넬 그냥 원 관원 밑으로 붙여 달라고. 내가 감당이 안 되니까 말이야."

"그건, 이미 물 건너간 거라 했잖습니까."

진수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럼 난 어떡하라구."

유한이 한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더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일을 바로잡을 희망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미안. 내가 제일 한심한 놈이지. 그렇지 않나? 이렇게 고개를 돌리고 있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말할 수조차 없어. 지금 자네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면 괴로워지기만 할 뿐이라고. 사실 유한이의 한 자는 한심한 한일세! 우리 서로 봐도 안 본 척 하고…."

"설마 아무 이유 없이 이러시는 건 아니라고 믿습니다."

진수가 유한의 말을 끊고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무표정으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나 그 대답은 결국 둘을 찾으러 여기저기를 들쑤시다가 겨우 난입해 온 윤구에 의해 들리지 않은 채 산란되어 버렸다.

"아이고, 한참 찾았는데. 이 사람 여기 있었…."

그러나 눈치가 빠른 탓인지 윤구는 곧장 좋지 않은 낌새를 알아차리고 말끝을 흐렸다. 그리곤 유한에게 물었다.

"여기 무슨 일 있었습니까."

진수는 그제서야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윤구에게서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 특히 최근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냉랭함이었기 때문이다.

"아…."

"경호 녀석 부탁을 받고 일부러 찾아왔더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거."

신경전인가. 묘한 기류가 흘렀다. 유한보다 한참 어린데다 근무일수도 몇 년간이나 차이가 나는데, 윤구는 거의 대등한 기를 내뿜고 있지 않는가. 잘못하다간 큰일날 수 있는 상황이라며 진수는 초조한 기색을 띄었다.

"허안 형님! 저, 저는."

진수가 다급하게 말을 걸자 그제서야 윤구가 진수 쪽을 돌아보며 조금은 덜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됐고, 설마 둘이 싸웠나? 저번과 너무 다른데. 솔직히 자네나 권지어른 정도면, 서로 의지하지 않고는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을 텐데?"

어쨌든, 내용은 여전히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윽."

"아, 아니. 나는 언제나 경호 자넬 도와줄 거지만 말이야."

원망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진수를 보고는 윤구가 슬쩍 말을 바꾸었다. 진수가 불안한 목소리로 윤구에게 아침의 일들을 설명하려 하였다.

"저는 애초에 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 권지께서 갑자기 절 무시하기 시작하셔서. 솔직히 제가 권지어른을 대하는 태도야, 수 일 전과 달라진 게 뭐 있습니까?"

그 말에 유한이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기운이 다 빠져 버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지, 그건. 그런데 어쩌겠나. 얼마 전에 자네 아버지가 병판 대감일지도 모른다는 해괴한 소리를 들어 버렸는데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더이상 전처럼 자넬 대할 수가 없어."

"예?"

되물은 것은 진수가 아닌 윤구였다. 그걸 무시한 채 유한은 철없는 투정을 계속했지만.

"아, 솔직히. 지금 자네한테 이렇게 소리내서 뭔갈 말하는 것 자체도. 힘드니까 말이네."

윤구가 진수에게로 달려가서 그 어깨를 부여잡았다. 둘의 키는 머리 하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반절 정도는 차이가 나는 정도인데다, 체격 차이도있는 편이라 진수의 몸은 휘청휘청 떨렸다.

"저 말, 진짜인가?"

윤구가 귓속말로 물었다. 진수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천천히 끄덕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아주 잠깐 뒤, 문득 놀란 표정으로 윤구를 향해 작게 말했다.

"잠깐만요, 모르셨습니까? 저는 형님께 그걸 일부러 숨기지는 않았습니다!"

윤구는 여전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답했다.

"아니, 그러면 그 중요한 걸 내가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물어보신 적 없지 않습니까!"

아, 그랬지. 물어본 적은 없었지. 그런데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느낌이 스며오는 것은 기분 탓인가. 끝끝내 그 이유를 찾은 윤구는 당황스런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작게 말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소리쳤다.

"아, 통성명 할 때 말한 적 없었잖나!"

"아."

변명거리조차 안 되는 일이었다. 처음 통성명할 때부터 그런 자질구레한 정보까지 밝히는 건 나름 예의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까. 뒤에서 따로 정보를 캐지 않으면 본인 입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유한의 경우가 극히 드문 일이라고나 할까.

*

"교수 어른께서 보내 주신 분입니까?"

진수의 반기는 목소리가 윤구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일년여 전 일이었다.

"생도 서윤구라고 합니다."

본인의 냉랭하기 그지없었던 목소리 역시, 그 뒤를 이어 머릿속을 스쳤다.

*

결국 처음부터 제대로 된 통성명을 하지 않은 건 윤구 자신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이마 언저리를 짚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라도 무사히 견뎌내게 할 목적으로 진수를 제 집에 당분간 눌러앉혔기에 다 끝난 일이 되긴 했지만. 그러고 보면 다 쓰러져가는 집에 살고 있는 놈이라 캐내도 별 것 없겠지 싶었던 기억도 있다.

"…하. 결국 내 잘못이 맞군그래. 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들 모르고 있었다면 완전히 상습범이 아닌가."

"그렇습니까."

둘은 결국 유한을 피해 주변 한적한 곳을 찾아 따로 이야기라도 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야 일 년 넘게 붙어다녔으니 자네가 사람으로서 어떤 이인지 알고, 이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성정이란 것도 알고. 덕분에 나도 자넬 평소처럼 대하는 데 별 불편하지도 않고 말야."

"예."

진수가 건조하게 답했다. 이에 윤구가 헛기침을 하고는 물었다.

"음, 정말 괜찮은 것 맞지?"

"예."

또다시 건조한 대답.

"하여튼 내 말은, 난 몰라도 권지어른처럼 자넬 처음 보고, 음, 별 볼 일 없는 놈인 줄 알고 편히 대하다가, 그 다음 날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이들은."

"예."

세 번이나 반복된 똑같은 대답에 윤구는 조금 지친데다, 제 말이 찔렸는지 아래와 같은 말을 덧붙였다.

"…상처받지 말게. 내 말은, 그런 이들에게는 좀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는 말이지."

"안 받았습니다. 그럼 전 어쩝니까?"

진수가 오랜만에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하자, 윤구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이후 진수는 억울한 듯한 말투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이라도 권지어른을 찾아가서, 도망가는 고양이 잡듯 저 무서운 사람 아닙니다! 겁내지 마십시오! 괜찮으니까 한 발짝만! 여기 맛좋은 생선도 있습니다! 해야 넘어오신단 겁니까? 게다가 그분의 반응은, 그저 당황한 정도가 아니셨습니다!"

"음, 확실히 그렇구만."

윤구가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대응했다.

"그렇지요? 당황한 것이 아니라…."

"맛좋은 생선! 맛좋은 생선 좋은데."

"예에?"

진수가 고개를 홱 돌려서 확인해 본 결과, 윤구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게다가 어딘가, 확신에 차 보였기도 했고.

"역시, 음식으로 마음을 얻는 것이 제일이란 것이네!"

"예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진수가 말꼬리를 과하게 올렸다. 무어라 말을 꺼내려고 하는 진수를 윤구가 가로막았다.

"에이, 자네 심정은 알겠다만, 금은보화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관계는 굉장히 한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먹을 건 어떤가! 아주 오래도록 두터운 관계를 쌓을 수 있지. 지금의 자네와 나처럼 말이네."

"제 기억엔 그런 거 없는데요…."

윤구가 진수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게다가, 허안 형님께서 짐작하시는 제 심정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하고 진수는 짧게 생각했다.

"물론 나도 그 자리에 함께하고 싶네! 둘만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안하단 말이야."

진수는 윤구의 말을 듣자마자 그 팔을 툭 하고 쳐냈다.

"아, 그냥 평범하게 식사를 같이 하고 싶다고 말씀하십시오!"

"아니아니, 그거랑은 전혀 다른 거지! 애초에 둘 다 돕겠다고 약조했고…."

"그럼 지금 저희 문제도 도와 주신다는 겁니까?"

살짝 긴장한 얼굴이었다. 윤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해 봐야지 뭐. 안 그러면 나도 불편해질 게 뻔하고. 또 그분이 자넬 계속 이렇게 무시하면 자넨 앞으로를 어떻게 견디나. 자, 그럼 이제 구체적인 걸 고민해 보세."

진수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은 대강 이렇게 짜여졌다. 퇴청 시각이 된 직후 멍하니 있을 유한을 예고 없이 데려와, 강제로 술과 음식을 대접할 작정이었다. 물론 유한을 데리러 가는 건 윤구가 맡게 되었다. 진수는 먼저 주막 안에 들어가 기다리기로. 둘 다 유한에게로 간다면 유한이 불편함을 느껴 자리를 피할 수 있다 여겨 어쩔 수 없이 합의한 결과였다.

*

"그래. 그래서."

같은 시각, 며칠 전과 같은 청사 앞마당에서 나머지 세 동기들 - 지함, 효민 도을 - 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전의 고된 일을 끝내고 오후 일을 시작하기 전 누릴 수 있는 꿀과 같은 휴식 시간이었다.

"판관 나으리와는 어떻게, 이야기라도 해 보았고?"

"예? 어떤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허안이 얘기지. 아, 절친한 벗이 궁금해하는 사안인데도 가만히 있었단 말인가?"

도을의 뜬금없는 말돌리기에 당황한 지함이 놀란 눈을 하며 반문하자, 실망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도을이 답했다. 분명 여태까지는 면신례의 고통과 그에 버금가는 일의 고됨을 번갈아 가며 들킬세라 매우 작은 목소리로 늘어놓던 참이었기에.

"아아, 참. 그건 허안한테 직접 물어보시라니까요오."

효민은 평소처럼 말끝을 주욱 늘리며 그 일에 관심 없음, 관련 없음, 부정적 감정 또한 없음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그것이 너무 평소와 같아 지함은 당황한 표정을 지우고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도을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아니, 허안이와 경호는 요즘 줄곧 둘만 붙어있지를 않나 면신례 직전부터 소, 아니 원 관원께 착 달라붙어 있질 않나. 내가 뭘 물어볼 틈을 안 줬단 말이네."

"흐으음…"

효민이 이제서야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는 듯 도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지함이 질렸단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으, 전 갑니다. 저는. 이런 일에, 관심없단 걸로 해주십시오."

"아니이, 이봐 백연(白淵, 유지함의 호)이, 기다려보게.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 아닌가아?"

효민이 얼른 지함의 팔을 잡고 그를 막아세웠다.

"아하, 내가 이 쓸데없는 정보를 이 이상 듣게 되어, 숙부님께 고하게 되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그걸 알기를 원하는 겐가? 그건 좀 흥미로운데. 어떻습니까, 석주(石酒, 이도을의 호) 형님."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청렴하기로 소문난 유이수가, 제 벗들의 의외의 면모를 보면 큰일 난다는 생각이 들어 도을은 결국 유지함을 편히 보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이도을 나름대로의 침착한 생각의 결과물로, 뒤에 유이수라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버티고 있는 게 확실한 지함보다야 조금 더 기다린다 해도 윤구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다는 논리였다.

"아니아니, 미안하네! 미안하고, 으음. 음, 우리, 이쯤하고 백연 저녀석의 깨끗한 영혼에 자유의 날개를 달아 주는 게 어떤가?"

"하하하, 그거 좋습니다아! 그럼 먼저 들어가 있게에! 우리끼리 이야기 끝내고…."

그 때였다. 도을이 자신에 동조하면서도 화젯거리를 계속 이어가길 원하는 효민을 순간 가로막고는 말했다.

"하하, 그렇다고 둘만 얘기하면 안 되지, 판관 나으리께 걸리면 문제 될 만한 얘기는 사실 본론은 아니었네! 그러니까 제하고, 저 녀석도 데려와서 허안이나 경호에게 대체 올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를 낱낱이 캐묻기 위한 준비 자리를…."

도을이 잠시 뜸을 들였다. 필시 혼자서 무언가 더 알아낸 정보가 있는 모양이나, 장소가 장소이며, 시간이 시간이다 여겨 따로 자리를 만들어서 이 나름대로의 중대한 사안에 대해 떠들려 하는 것일 터. 아니면….

"오늘 저녁 퇴청한 후, 주막에서 만들지."

도을은 한껏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지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함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도을을 말렸다.

"으, 안됩니다. 그만두십시오! 차라리 절 빼놓고 하시란 말입니다!"

"오, 그건 아닌 것 같다니까. 어떻게 자넬 이런 자리에서 빼겠나?"

"좋게 포장했을 뿐, 결국 술 마시러 가고 싶으신 거잖습니까!"

지함이 결국 직설적으로 도을의 양심을 찔렀다. 중대한 사안은 무슨. 이미 그 수에 당해 본 횟수가 일백 번은 가뿐히 넘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도을은, 이번에는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제 본심을 내뱉었다.

"훗. 당연하지."

*

"모든, 사람에겐, 자신의, 자리와, 합당한, 책무가, 있다고?"

유한은 이 말을 반복해서 중얼대며 한 단어가 끝날 때마다 숫자 하나씩을 써내려가며 여전히 그 날의 분량을 맞추기 위한 계산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결국 자기조차 그걸 던져 버린 거나 다름 없으면서. 그 자 같은 양반집 도련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구, 살면서 듣도 보도 못했네."

머릿속이 어지러워 붓을 내려놓고는 그는 관모 밑으로 살짝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괴롭게 쥐어뜯으며 위와 같이 혼잣말을 했다.

유한은 결국 하루 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혼자 일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심한 말로 사람을 내쫓은 데 대한 벌이었다. 물론 이렇게 될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차라리 혼자 벌을 받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 여겼기 때문인지 유한에겐 아무런 후회가 없었다. 그리곤 다른 이들의 어떤 말이나 행동에도 관심조차 두지 않은 채로 하루를 의미 없이 흘려보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뻔 했는데…."

그리고 나서 유한은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진수를 알게 되기 전보다 훨씬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오늘 퇴청하기 전까지 이 봉사가 여기 나타난다면, 그러면 그 녀석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겨도 될지 모른다.'

여러 번 꼬아서 끊어질 것만 같은 다짐. 그러나 제가 며칠 전 겪어 본, 그리고 그 날 아침에 본 진수의 성정으로 보아, 그는 절대 그리할 사람이 아니었다. 유한은 한숨을 쉬며 꾸역꾸역 남은 계산을 해치워 나갔다.

*

"…니까?"

불현듯 들려오는 큰 소리에 유한이 깜짝 놀라 감았던 눈을 떴다.

'자, 자 버렸다!'

눈을 뜨니 벌써 주변이 어두컴컴하다. 아직 일도 많이 남았을 텐데. 너무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가. 역시 처음 보는 이들과 대면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그들이 뭘 숨기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자신이 가진 비밀 역시 간파당할지 몰라 꽁꽁 싸매고 매 순간 긴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역산하는 데도 머리를 많이 굴려야 해 피곤한 참인데,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김 권지 어른 계십니까?"

아까와 같은 목소리가 또 다시 문 너머에서 들려 왔다. 이전 들어 보았던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이 봉사의 벗이라던 자. 역시 본인은 오지 않았군. 혹시 내일부터는 원 관원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을 대신 전하러 온 것이 아닐까. 하긴 꼴도 보기 싫다는 말을 먼저 한 건 유한이니 말이다.

"지금 나가네."

유한이 떨리는 팔다리를 이끌고 걸어가 미닫이문을 열었다. 조금 덜컹거리긴 했지만 두어 번 만에 열리는 게, 나름대로 삼력청에 오래 있었던 관원임을 증명해 주었다. 눈 앞엔 역시나 예의 진수의 벗이라는 이가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런데 혹시 자넬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아, 권지 서윤구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희 집안은 본래 평범한 의원 가문이니 걱정 마십시…."

'으. 누가 자네 집안이 궁금하댔나. T단치도 않고, M르는 게 더 나았을, I런 쓸데없는 소리.'

유한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윤구를 바라보았다.

"프훗."

윤구는 제 소개를 하는 동안 웃음을 겨우 참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에는 제대로 웃음이 터져 버렸다.

"무, 무슨 일인가!"

"크큭, 하, 한쪽 뺨이…."

붉은 뺨을 가득 채운 종이가 겹쳐진 자국. 종이들 위에 엎어져 몇 시진 정도 자고 윤구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겨우 일어났으니 당연했다. 유한이 다급하게 양볼을 손바닥과 관복 소매로 가렸다.

"으, 아…. 으, 보지 말게! 그보다 진짜로 자넨, 날 무슨 일로 찾아왔는데…."

윤구가 시선을 돌려 유한의 눈을 피한 채로 제안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 제가 처음 뵙는 분이지 않습니까. 오늘 저녁에라도 한 끼 사 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뜬금없는 공짜 밥 소식에 유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한이 차마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윤구가 다음 말을 했다.

"아, 딱히 부정은 안 하시니, 괜찮으시단 거죠? 빨리 갑시다!"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정리 좀, 정리 좀 하고…."

유한의 애매한 답에 윤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천천히 하고 나오십시오. 전 예서 기다리겠습니다."

*

윤구가 유한을 데리고 - 말이 그렇지 거의 손목을 잡아끌고 - 향한 주막. 그곳은 본래 도을이 윤구나 다른 벗들을 데리고 자주 들르는 곳이었다. 진수는 먼저 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와앗!"

윤구가 마당에 발을 들이려고 할 때쯤 진수가 황급하게 달려나와 윤구를 막아세웠다. 윤구를 따라들어오던 유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여, 여,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뭐, 뭔데 그러나!"

윤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쪽 방문이 열리고, 도을이 뛰어나왔다.

"오, 허안이 왔는가! 기다리고 있었네! 글쎄 뭔가, 자네들 얘기를 하려고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경호가 혼자 걸어들어오는 게 아닌가!"

"…예?"

"필시 그 녀석이 혼자 올 리가 없고, 분명 후에 몇 명 달고 들어오겠거니 했는데. 내 예상이 맞았군. 잡혔네!"

도을이 윤구 일행을 슥 둘러보더니 말했다.

"오, 잠깐? 그 뒤에 있는 거…."

"으아아!"

유한이 도을을 보더니 겁에 질린 표정으로 윤구 뒤에 주저앉았다. 도을이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윤구 뒤로 돌아가 자세를 낮추었다.

"뭐야. 김유한이가 왜 여깄…."

"어? 석주 형님 이 분 아십니까?"

도을이 혀를 차면서 대답했다.

"알지. 그래도 생도 시절 몇 년을 함께했는데. 경호보다 오래 지냈을 걸. 그보다 진짜 악연이구만."

유한은 여전히 윤구 뒤에서 같은 자세로 쪼그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는, 어서 이 상황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면서.

"그러고 보면, 우리 중 한 명은 무조건 이 사람 밑으로 들어갔겠지. 누군가, 그 운 안 좋은 녀석은. 자넨가?"

도을이 윤구에게 물었다.

"아…. 말씀 안 드렸겠지만 제 직속 상관은 소호 나리입니다."

도을이 이에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소리 없이 무릎을 내리치고는 다시 원래 있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건 다른 이들에게도 속보를 가져가는 발걸음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윤구는 당황하여 도을이 들어간 문 쪽만 보고 있었다. 이렇게 한 바탕 소란이 끝났다.

"…괜찮으십니까."

그 동안 말 없이 이 일을 쳐다보고만 있던 진수가 유한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켰다.

"어, 어어…."

유한은 여전히 진수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였다.

"그보다 아까 전 일은 대체…."

"아, 뭐…. 신경 쓰지 말게. 어차피 이런 일이야 익숙해. 자네들이 이도을과 친할 줄은 몰라서…."

다른 이들이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유한이 계속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날 데려와서 무슨 얘기를 하려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난 오늘 그냥 밥만 얻어 먹고 갈 생각이네. 게다가 난 오늘 일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어. 내일 제정신으로 더 많이 일 해야 하네."

"예…."

진수가 상심한 표정을 지었다. 유한은 개의치 않고 단언했다.

"그러니, 뭘 캐묻는다든지 하지 말라구."

*

"그래서, 지금 여기서 퍼져 있는 사람이 김 권지라는 분인 겐가아? 경호의 직속 상관이고?"

어느새 윤구와 유한, 그리고 진수 세 명만 있던 방은 지함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의 난입으로 꽉 차게 되었다. 주량이 적은 유지함은 진작에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다가 쓰러졌을 터. 효민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유한을 들여다보았다.

"아, 대체 왜 들어오십니까!"

윤구가 작게 소리치고는 도을과 효민을 유한의 시선이 닿지 않는 방 구석으로 몰아 넣었다. 사생활이 노출될 위기에 처한 유한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다.

"에이. 재밌어 보이잖나?"

"두 분 그만 조용히 하시고, 아까부터 계속 작게 중얼거리는 거 뭐라 하시는지나 좀 들어 봅시다."

윤구가 둘을 제지하고는 유한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으…. 나, 이 봉사 같은 사람은 싫네. 왠지 아나? 나는, 양반님들 하는 것들이 싫어. 비단옷이나, 그들의 행동이나, 태도나, 말투, 학식을 뽐내는 것, 그런 것들."

"예? 제가 언제 권지어른 앞에서 그랬습니까?"

진수가 얼굴이 하얘져서는 되물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놈 언행이란, 생각보다 물렁해서 탈인데."

"으에에? 물렁? 자리가 어쩌고 하는 얘기 자넨 못 들어 봤나 보지? 어쨌든, 결국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판이하게 다르지 않나? 나는 그들과 있으면 불행해지네."

여전히 상 위에 자빠져 있는 채로 유한이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뭐어, 어차피 까 보면 나오니까 말인데. 나는 서얼이거든. 지금에야 스승님 댁에 있지만."

가장 놀란 건 의외로 진수였다.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로 눈동자를 한참 굴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호, 혹시 어느 댁의…."

"글쎄, 스승님이 알려 주셨었는데, 기억도 안 나."

"예에? 어떻게 그걸 모릅니까?"

윤구가 어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이에 진수가 윤구의 팔을 잡고는 작은 목소리로 됐습니다. 하고 속삭였다.

"또, 유한이란 이름은, 내 원래 이름이…."

"…예?"

그리고는 바로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진수가 당황한 표정으로 유한을 흔들어 깨웠다. 다음 말을 어떻게든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유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 오늘도 오후 내내 잤다 하셨으면서, 또 주무시네."

윤구가 이마를 짚었다. 진수는 여전히 유한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채였다.

"그럼 이 분, 술 마시면 주무시는 그런 거 아닙니까? 이미 아까 쓰러지실 때부터 한계셨을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갑작스런 제안에 윤구가 진수를 돌아보았다.

"이 정도까지 말씀하셨다는 건, 이미 충분히 저에 대한 마음이 풀어지셨단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내일 가서 직접 물어보겠습니다."

윤구는 그걸 듣고 얼마간 이해가 안 된다며 멍하니 있다가, 진수의 의중을 겨우 깨닫고는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진수의 등을 토닥였다.

"에구, 우리 경호가 그만…. 술을 안 해서 잘 모르는구만. 보통은 내일이 되면 지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잊을 걸. 게다가 권지어른의 진짜 이름 같은 걸 알고 싶은 거라면, 그건 말하지도 않으려 할 거야."

"하지만, 오늘 일이 결국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생각해 보면, 말씀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적어도 전 마음 먹고 누군가를 속이려고 한 적…."

*

"…없단 말입니다."

다음 날 아침, 진수는 그 전날 일을 유한에게 이야기하고 유한의 원래 이름에 대해서 물어보고는, 윤구에게 했던 말과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다행히도 유한은 진수에 대한 거리감이 조금이나마 줄어든 상태였다. 여전히 눈은 마주치지 못했지만, 전날과 같이 무조건적인 거부반응은 없었다고나 할까. 전날 결국 제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었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감정을 털어놓으면서 무의식적인 괴로움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단 것이 두 번째 이유였고, 유한을 끌고 정식의 집에 올라가 자초지종을 털어놓은 윤구와 진수 덕분에 등청하는 길 정식으로부터 한 소리 들은 것도 이유였다.


'그 녀석은 생각보다 믿을 만한 아이다. 그냥 편하게 아랫사람이다 생각하래도.'


'그런데 이게 뭡니까? 벌써부터 저를 협박이나 하고는, 물론, 물론 다 맞는 말이지마는!'

유한은 속으로 정식을 계속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겨우 평정을 유지하고는 답했다.

"근데 그거, 내 이름을 말하는 거라면 나도 딱히 속인 거라기보단…."

"예?"

"공문서만 뒤져 봐도 알았을 텐데. 특히 자네한테 직속 상관 배정을 전달해 준 서 권지나…."

"아!"

진수가 그제서야 깨달은 듯 손을 맞부딪쳤다. 물론 이상한 부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윤구 역시 전날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 말투로 진수를 대했기 때문이다.

"아, 근데, 내 입으론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서. 미안하네. 괜찮다면 서 권지한테 좀 다녀오게."

"그래도 됩니까?"

"그래 뭐…. 내가 전일 아이처럼 굴었던데다 오늘도 이런 고집을 부리니 미안해야 할 건 나겠지…."

유한이 혼잣말을 하듯 말끝을 흐렸다. 그새 진수는 어디론가 달려간 상태였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인지 계속 손이 떨렸다.

'이 봉사가 그걸 알든 말든. 알 게, 무엇인가.'

*

"미안하네만, 그거 나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 문서를 처음 받아 보신 게, 허안 형님이시잖습니까?"

윤구가 어쩔 줄 몰라하며 답했다.

"헌데, 그 때 내가 본 게 뭐였냐면…."


<三曆廳雜務官兼權知 金○○(삼력청 잡무관 겸 권지 김○○)>


윤구가 전달받았던 문서엔 단지 성만 적혀 있었다. 이전에 유한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보았다지만 유한이란 이름이 가명인 것을 포함해 아무 것도 몰랐고, 그나마 해괴한 관직 이름인데다 앞에 삼력청이란 단서가 붙어 있어 그것만으로 그가 누구며 어디에 있을지 추측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다시 가서 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어떤가. 어제 자네 말대로. 나도 반신반의했는데, 자네 얘기 들어 보니 진짜로 마음 풀리신 것 같고."

"그거야 그런데, 사실은 권지어른께서 자기 입으로는 말하고 싶지 않다 하셔서…."

진수가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 말했다.

"음, 그럼 그냥, 포기하는 게 어떤가?"

윤구의 말에 진수가 이해하지 못했단 듯 고개를 돌렸다.

"포기…?"

"자네한테 있어서 지금까지의 가장 큰 과제는 권지어른과 함께 그 고생길 가득한 자리에서 빠져나오고, 남들과 비슷한 관직 생활의 길로 넘어오는 것. 그리고 그게 가능하게 하기 위해 일단은 오해를 풀고 둘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그리고 이건 이미 어떻게든 일단락되었지."

윤구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말했다.

"거기에서, 우리가 아는 권지어른의 함자가 진짜든 가짜든 간에,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네. 본인이 그걸 밝히는 걸 원치 않고 계속 유한이라고 불리길 원하신다면, 이미 김 권지께는 그게 자기 이름인 게지. 석주 형님도 그렇게 알고 계셨잖나?"

진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윤구가 예상했단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인간관계에 서툰 걸 감안하고 첨언하자면, 굳이 숨기는 것 없이 모든 걸 알고 있고 그래야만 절친한 사이가 되는 것이 아니네. 자네와 나도 어찌 보면 그런 사이 아닌가?"

"…그랬었지요."

"모든 걸 알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시작하고 나서 서서히 알게 되는 게지. 마치 서로가 쥔 패를 처음에는 모르고 있다 판이 돌아갈수록 상대의 패를 짐작할 수 있게 되고, 끝내는 확신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눠 보면 알게 될 것이네. 이 사람에겐 나를 털어놓아도 되겠다 확신하는 거지. 결국 무엇이든 시간이 가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진수는 윤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나, 적어도 이해 하지 못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면서 점점 상대를 신용하게 되고 더 관계가 두터워지는 것인데. 이건 한참 나중의 일이고. 자네와 권지 어른 성정이면…. 별 기대는 하지 말게."

"그러면, 대체 어제 술은 왜 먹이신…."

"아, 그거야. 시작도 못 할 상황이니 그렇지. 나는, 음식을 대접했을 뿐이네. 어디까지나!"

이에 진수가 어이없이 웃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정도의 술은 내게는 음식의 범…. 하. 그래. 일단은 내 약조한 게 있으니 조만간 계획을 가지고 찾아가겠네."

결국 윤구는 진수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고, 진수와의 약조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것으로 대화를 마쳤다. 그 말에 진수의 표정이 겨우 밝아졌다.

"예. 알겠습니다."

진수는 이걸 끝으로 고개를 까딱하며 목례를 하고는 황급히 빠져나갔다. 남아 있는 건 윤구의 한숨 뿐이었다.

*

"저 왔습니다. 권지 어른."

밖에서 들리는 진수의 목소리에 유한이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슬슬 문 여는 것 정도는 익혀 보게. 문 망가지면야 자네 집안에서 물겠지."

"으, 아직도 그걸로…."

"어쨌든 그래, 서 권지가 알던가. 무슨 글자를 쓰는지도 봤겠지. 그러니까…."

유한이 고개를 떨구었다. 진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러 이유로 알아내지 못했는데, 서 권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제일 큰 이유는 역시, 굳이 알 필요가 없어섭니다."

"뭐? 오늘 아침만 해도 그, 그렇게 죽일 듯이 덤벼들더니. 자네 요, 용기가 없구만!"

진수의 말에 당황한 동시에 긴장이 급하게 풀려, 유한은 부자연스러운 손놀림과 말투로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다시 생각해 보니 김 권지께서 불리길 원하시는 이름이 진짜일 것이기도 하고, 저도 김 권지께서도 아직 서로의 패를 모르고, 나중에 제 패가 무엇인지 확신하신다면 그 때…!"

아까 윤구의 그 말, 생각보다 괜찮았는데. 전달하려니 전부 꼬여 버렸다. 유한이 눈썹을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진수를 바라보았다. 진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뭐라는 건가. 어쨌든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거 맞지? 조금 있다가 못 견뎌 하직하거나 할 건 아니지?"

"…뭘 그런 생각부터 먼저 하십니까. 아 참 그리고."

그제서야 윤구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진수는 다시 이전과 같이 밝은 표정을 한 채 유한에게 전했다.

"저희가 제대로 대우 받을 수 있도록, 서 권지가 힘 써 준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응하는 유한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마음은 고맙다만, 이미 안 될 걸 아는 상태에서 뭘."

"예?"

"그거, 스승님께서도 매번 말씀하신 건데. 결국 매번 실패했고 나는 계속 이 자리…."

진수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말을 한 게 자신이 처음이 아니란 것에도, 교수란 자리에 있는 정식조차도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단 것에도 그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뭐, 괜찮네. 정말 마음은 고마우니까. 이젠 괜찮아, 이렇게 다시 자넬 전처럼 대할 수 있고. 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적막이 흘렀다. 유한이 시선을 조금 틀었다.

"정말 서 권지와 자네 둘이 해결할 수 있다면, 스승님께서 자네를 내 밑에 심은 게 어쩌면, 그 분의 마지막 방법일지도, 모르겠네."

그 때쯤 유한의 얼굴은 거의 긴장에서 벗어나 있었다.

"스승님은 아무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날 도우실 수 있는 분은 아니니 말이야. 아, 이 말. 뭔가 수단과 방법 없이 날 도우라는 걸로 들리겠군. 미안하네."

진수가 고개를 가로젓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어차피 쓸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은 다 써서라도 제 자리를 찾아야 하니."

제 자리 라는 말에 유한이 잠시 주춤하였으나, 이내 그것이 진수에게 무얼 의미하는지 깨닫고 나서는 편안한 얼굴로 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이름이 내 진짜 이름이라니. 스승님께서도 비슷한 말을 하셨던 적이 있었지. 그러면 이 봉사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가 스스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리가, 진수에게 있어선 제 자리 인 것이다. 라고. 유한은 오래간만에 편안한 표정으로 일거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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