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壹_朔

서운관측후일지



 프롤로그부터 새로 쓰고 있으니 읽어주세요!

리뉴얼 업데이트 현황: 프롤로그 ● / 에피소드 1 ●●●● / 에피소드 2 ○○


예상대로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삼력청 뒤편으로 돌아가 찾아보니, 숨거나 다른 곳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계단 위에 앉아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고 있는 유한이 보였다. 그는 매우 초조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진수는 비록 그걸 눈치채지는 못했으나 어딘가 심상찮은 분위기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진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결심이 선 듯 유한을 향해 다가가며 말을 걸려 했다. 그러나 인기척을 느낀 유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고 거기, 딱 거기에 있어 주면 안 되겠나."

이미 다 포기한 듯한 말투였다.

"역시, 스승님께 말씀드려야겠어. 자넬 그냥 원 관원 밑으로 붙여 달라고. 내가 감당이 안 되니까 말이야."

"그건 이미 물 건너간 거라 했잖습니까."

진수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럼 난 어떡하라구."

유한이 한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더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일을 바로잡을 희망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미안. 내가 제일 한심한 놈이지. 그렇지 않나? 이렇게 고개를 돌리고 있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말할 수조차 없어. 지금 자네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면 괴로워지기만 할 뿐이라고. 사실 유한이의 한 자는 한심한 한일세! 우리 서로 봐도 안 본 척 하고…."

"설마 아무 이유 없이 이러시는 건 아니라고 믿습니다."

진수가 유한의 말을 끊고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무표정으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나 그 대답은 결국 둘을 찾으러 여기저기를 들쑤시다가 겨우 난입해 온 윤구에 의해 들리지 않은 채 산란되어 버렸다.

"아이고, 한참 찾았는데. 이 사람 여기 있었…."

그러나 눈치가 빠른 탓인지 윤구는 곧장 좋지 않은 낌새를 알아차리고 말끝을 흐렸다. 그리곤 유한에게 물었다.

여기 무슨 일 있었습니까."

진수는 그제서야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윤구에게서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 특히 최근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냉랭함이었기 때문이다.

"아…."

"경호 녀석 부탁을 받고 일부러 찾아왔더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거."

신경전인가. 묘한 기류가 흘렀다. 유한보다 한참 어린데다 근무일수도 몇 년간이나 차이가 나는데, 윤구는 거의 대등한 기를 내뿜고 있지 않는가. 잘못하다간 큰일날 수 있는 상황이라며 진수는 초조한 기색을 띄었다.

"허안 형님! 저, 저는."

진수가 다급하게 말을 걸자 그제서야 윤구가 진수 쪽을 돌아보며 조금은 덜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됐고, 설마 둘이 싸웠나? 저번과 분위기가 너무 다른데. 솔직히 자네나 권지어른 정도면, 서로 의지하지 않고는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을 텐데?"

어쨌든, 내용은 여전히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윽."

진수가 윤구를 원망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 아니. 나는 언제나 경호 자넬 도와줄 거지만 말이야."

그런 진수를 보고는 윤구가 슬쩍 말을 바꾸었다. 진수가 불안한 목소리로 윤구에게 아침의 일들을 설명하려 하였다.

"저는 애초에 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 권지께서 갑자기 절 무시하기 시작하셔서. 솔직히 제가 권지어른을 대하는 태도야, 수 일 전과 달라진 게 뭐 있습니까?"

그 말에 유한이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기운이 다 빠져 버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지, 그건. 그런데 어쩌겠나. 얼마 전에 자네 아버지가 병판 대감일지도 모른다는 해괴한 소리를 들어 버렸는데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더이상 전처럼 자넬 대할 수가 없어."

"예?"

되물은 것은 진수가 아닌 윤구였다. 그걸 무시한 채 유한은 철없는 투정을 계속했지만.

"아, 솔직히. 지금 자네한테 이렇게 소리내서 뭔갈 말하는 것 자체도. 힘드니까 말이네."

윤구가 진수에게로 달려가서 그 어깨를 부여잡았다. 둘의 키는 머리 하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반절 정도는 차이가 나는 정도인데다, 체격 차이도있는 편이라 진수의 몸은 휘청휘청 떨렸다.

"저 말, 진짜인가?"

윤구가 귓속말로 물었다. 진수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천천히 끄덕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아주 잠깐 뒤, 문득 놀란 표정으로 윤구를 향해 작게 말했다.

"잠깐만요, 모르셨습니까? 저는 형님께 그걸 일부러 숨기지는 않았습니다!"

윤구는 여전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답했다.

"아니, 그러면 그 중요한 걸 내가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물어보신 적 없지 않습니까!"

아, 그랬지. 물어본 적은 없었지. 그런데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느낌이 스며오는 것은 기분 탓인가. 끝끝내 그 이유를 찾은 윤구는 당황스런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작게 말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소리쳤다.

"아, 통성명 할 때 말한 적 없었잖나!"

"아."

변명거리조차 안 되는 일이었다. 처음 통성명할 때부터 그런 자질구레한 신분에 출신까지 밝히는 건 나름 예의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까. 뒤에서 따로 정보를 캐지 않으면 본인 입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유한의 경우가 극히 드문 일이라고나 할까.


*


"교수 어른께서 보내 주신 분입니까?"

진수의 반기는 목소리가 윤구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일년여 전 일이었다.

"생도 서윤구라고 합니다."

본인의 냉랭하기 그지없었던 목소리 역시, 그 뒤를 이어 머릿속을 스쳤다.


*


결국 처음부터 제대로 된 통성명을 하지 않은 건 윤구 자신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이마 언저리를 짚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라도 무사히 견뎌내게 할 목적으로 진수를 제 집에 당분간 눌러앉혔기에 다 끝난 일이 되긴 했지만. 그러고 보면 다 쓰러져가는 집에 살고 있는 놈이라 캐내도 별 것 없겠지 싶었던 기억도 있다.

"…하. 결국 내 잘못이 맞군그래. 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들 모르고 있었다면 완전히 상습범이 아닌가."

"그렇습니까."

둘은 결국 유한을 피해 주변 한적한 곳을 찾아 따로 이야기라도 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야 일 년 넘게 붙어다녔으니 자네가 사람으로서 어떤 이인지 알고, 이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성정이란 것도 알고. 덕분에 나도 자넬 평소처럼 대하는 데 별 불편하지도 않고 말야."

"예."

진수가 건조하게 답했다. 이에 윤구가 헛기침을 하고는 물었다.

"음, 정말 괜찮은 것 맞지?"

"예."

또다시 건조한 대답.

"하여튼 내 말은, 난 몰라도 권지어른처럼 자넬 처음 보고, 음, 별 볼 일 없는 놈인 줄 알고 편히 대하다가, 그 다음 날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이들은."

"예."

세 번이나 반복된 똑같은 대답에 윤구는 조금 지친데다, 제 말이 찔렸는지 아래와 같은 말을 덧붙였다.

"…상처받지 말게. 내 말은, 그런 이들에게는 좀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는 말이지."

"안 받았습니다. 그럼 전 어쩝니까?"

진수가 오랜만에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하자, 윤구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이후 진수는 억울한 듯한 말투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이라도 권지어른을 찾아가서, 도망가는 고양이 잡듯 저 무서운 사람 아닙니다! 겁내지 마십시오! 괜찮으니까 한 발짝만! 여기 맛좋은 생선도 있습니다! 해야 넘어오신단 겁니까? 게다가 그분의 반응은 그저 당황한 정도가 아니셨습니다!"

"음, 확실히 그렇구만."

윤구가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대응했다.

"그렇지요? 당황한 것이 아니라…."

"맛좋은 생선! 맛좋은 생선 좋은데."

"예에?"

진수가 고개를 홱 돌려서 확인해 본 결과, 윤구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게다가 어딘가 확신에 차 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음식으로 마음을 얻는 것이 제일이란 것이네!"

"예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진수가 말꼬리를 과하게 올렸다. 무어라 말을 꺼내려고 하는 진수를 윤구가 가로막았다.

"에이, 자네 심정은 알겠다만, 금은보화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관계는 굉장히 한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먹을 건 어떤가! 아주 오래도록 두터운 관계를 쌓을 수 있지. 지금의 자네와 나처럼 말이네."

"제 기억엔 그런 거 없는데요…."

윤구가 진수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게다가, 허안 형님께서 짐작하시는 제 심정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하고 진수는 짧게 생각했다.

"허나 자넨 가진 게 없을 게 뻔하니 내가 그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네! 게다가 둘만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안하단 말이야."

진수는 윤구의 말을 듣자마자 그 팔을 툭 하고 쳐냈다.

"아, 그냥 평범하게 식사를 같이 하고 싶다고 말씀하십시오!"

"아니아니, 그거랑은 전혀 다른 거지! 애초에 둘 다 돕겠다고 약조했고…."

"그럼 지금 저희 문제도 도와 주신다는 겁니까?"

살짝 긴장한 얼굴이었다. 윤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해 봐야지 뭐. 안 그러면 나도 불편해질 게 뻔하고. 또 그분이 자넬 계속 이렇게 무시하면 자넨 앞으로를 어떻게 견디나. 자, 그럼 이제 구체적인 걸 고민해 보세."

진수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선 윤구가 소매를 뒤적거리더니 손바닥만한 보따리를 꺼냈다.

"이게 뭔지 아는가!"

"…맛좋은 생선입니까…?"

윤구가 매듭을 풀어 보이자 안에는 꽤 그럴 듯해 보이는 단 과자들이 있었다. 몇몇은 아주 달고 기름져 보였다. 진수가 그걸 보고는 눈썹을 찡그렸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맞다, 자넨 그런 거 안 먹었던가?"

진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구가 혀를 차며 그 중에서 그나마 덜 단 유과 하나를 꺼내서 진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윤구의 예상대로 진수는 곧장 눈썹을 찡그렸다.

"뭐, 자네 같은 이들 말고는 다들 좋아하는 음식이니 걱정 말게. 어차피 자넨 그 `맛좋은 생선'도 먹지 않잖나."

"그건, 그건…. 고양이 얘기였잖습니까!"

윤구의 말에 토를 다는 걸 보아하니 어떻게든 다 씹어삼킨 모양이었다.


*


"모든, 사람에겐, 자신의, 자리와, 합당한, 책무가, 있다고?"

유한은 이 말을 반복해서 중얼대며 한 단어가 끝날 때마다 숫자 하나씩을 써내려가며 여전히 그 날의 분량을 맞추기 위한 계산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결국 자기조차 그걸 던져 버린 거나 다름 없으면서. 그 자 같은 양반집 도련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구, 살면서 듣도 보도 못했네."

머릿속이 어지러워 붓을 내려놓고는 그는 관모 밑으로 살짝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괴롭게 쥐어뜯으며 위와 같이 혼잣말을 했다.

유한은 결국 하루 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혼자 일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심한 말로 사람을 내쫓은 데 대한 벌이었다. 물론 이렇게 될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차라리 혼자 벌을 받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 여겼기 때문인지 유한에겐 아무런 후회가 없었다. 그리곤 주변 사람들의 어떤 말이나 행동에도 관심조차 두지 않은 채로 하루를 의미 없이 흘려보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뻔 했는데…."

그리고 나서 유한은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진수를 알게 되기 전보다 훨씬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오늘 퇴청하기 전까지 이 봉사가 여기 나타난다면, 그러면 그 녀석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겨도 될지 모른다.'

여러 번 꼬아서 끊어질 것만 같은 다짐. 그러나 제가 며칠 전 겪어 본, 그리고 그 날 아침에 본 진수의 성정으로 보아, 그는 절대 그리할 사람이 아니었다. 유한은 한숨을 쉬며 꾸역꾸역 남은 계산을 해치워 나갔다.


*


"…계십니까?"

말소리와 겹치는 문 두들기는 소리. 불현듯 들려오는 큰 소리에 유한이 깜짝 놀라 감았던 눈을 떴다.

'자, 자 버렸다!'

눈을 뜨니 벌써 주변이 어두컴컴했다. 아직 일도 많이 남았을 텐데. 너무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가. 역시 처음 보는 이들과 대면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그들이 뭘 숨기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자신의 사적인 일 역시 간파당할지 몰라 꽁꽁 싸매고 매 순간 긴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역산하는 데도 머리를 많이 굴려야 해 피곤한 참인데,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김 권지 어른 계십니까?"

아까와 같은 목소리가 또 다시 문 너머에서 들려 왔다. 이전 한 번 들어 보았던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이 봉사의 벗이라던 자. 역시 본인은 오지 않았군. 혹시 내일부터는 원 관원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을 대신 전하러 온 것이 아닐까. 하긴 꼴도 보기 싫다는 말을 먼저 한 건 유한이니 말이다.

"지금 나가네."

유한이 떨리는 팔다리를 이끌고 걸어가 미닫이문을 열었다. 조금 덜컹거리긴 했지만 두어 번 만에 열리는 게, 나름대로 삼력청에 오래 있었던 관원임을 증명해 주었다. 눈 앞엔 역시나 예의 진수의 벗이라는 이가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런데 혹시 자넬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아, 권지 서윤구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희 집안은 본래 평범한 의원 가문이니 걱정 마십시…."

"으. 누가 자네 집안이 궁금하댔나.''

유한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윤구를 바라보았다.

"프훗."

윤구는 제 소개를 하는 동안 웃음을 겨우 참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에는 제대로 웃음이 터져 버렸다.

"무, 무슨 일인가!"

"크큭, 하, 한쪽 뺨이…."

붉은 뺨을 가득 채운 종이가 겹쳐진 자국. 종이들 위에 엎어져 한참을 자다가 윤구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겨우 일어났으니 당연했다. 유한이 다급하게 양 볼을 손바닥과 관복 소매로 가렸다.

"으, 아…. 으, 보지 말게! 그보다 진짜로 자넨, 날 무슨 일로 찾아왔는데…."

윤구가 시선을 돌려 유한의 눈을 피한 채 예의 과자들을 건넸다.

"이 봉사 것입입니다만, 아무래도 어른께서 자기 얼굴을 못 보실 것 같으니 저더러 전해 달라고 하길래."

그러면서 윤구는 긴장한 듯 유한의 표정을 주시했다. 유한이 원래 단순한 사람이란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준비했다. 평범한 의원 집안이라 하였지. 윤구는 그 평범한 의원인 아버지로부터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몇 차례 들어왔었다. 그러면 철천지 원수가 될 뻔 했던 진수와도 별 탈 없이 지낼 만한 계기가 되어 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 성정이 저런 모양이 된 것도 단 걸 지지리도 싫어하는 탓인가.'

윤구는 제 지시대로라면 문 바로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진수를 떠올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애초에 단 맛은 둘째치고 타인이 느끼기에는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는 것만 선호하는 진수였다. 마치 본인 성정과 같이. 얼핏 봐서는 전혀 다른 이들과 섞일 수 없겠다 싶지만 막상 어울려 보면 그게 아닌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부족한 면이 많긴 했지만 모든 이들이 완벽하지는 않지 않은가. 생도 시절부터 그랬다. 원활한 인간관계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그 나름대로의 건조함과 담백함은 생도들 틈에 묻혀 있다가도 언젠가 한 번씩은 빛을 발했다. 그러니 이 녀석이 양반가 자제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윤구는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권지 어른께서도 경호의 그런 면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는데.'

유한의 눈이 천천히 둥그레졌다. 그 반응을 본 윤구의 속이 일단은 조금 편해졌다.

"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몰라도 맛있네, 이거."

그러나 그는 여전히 경계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저, 맛있긴 한데 이거, 정말 이 봉사가 부탁한 게 맞는가?"

"예. 아까 일이 있고 나서 그 애가 아무래도 그냥 있을 수는 없다며, 권지어른께 뭔가 해 드려야 할 것 같다고 제게 부탁해 오기에 제가 조금 도와 준 것일 뿐입니다."

어느 정도의 과장을 보태 가며 윤구가 말했다. 유한은 살짝 고민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걱정하는 듯 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유한은 그쪽을 주시하며 원래의 제 자리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혹시…, 지금 이 봉사가 밖에 있으면…."

"들여보낼까요?"

윤구가 금세 화색을 띠었다. 그리고 그것이 유한에게는 굉장한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윤구처럼 아무렇지 않게 진수를 대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잘못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유한은 윤구의 눈길을 피한 채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서윤구는 가볍게 삼력청 밖으로 뛰어나갔다.

윤구가 진수를 데리고 들어와서는 유한 앞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게 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 이거…. 맛있네! 그러니까 자네가 여기 들어오는 걸 허락한 거야. 알겠나?"

"…저,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어차피 저는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습니다."

유한과 진수는 서로를 똑바로 마주보지 못한 채로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것을 지켜보는 서윤구로서는 비록 마음 속으로였긴 했지만 그리도 열심히 칭찬해 주었던 진수의 성정이 생각보다 까다롭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니 머리가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유한의 손이 땀으로 절여 오는 것도 윤구의 눈에만 보였다. 참다 못한 윤구가 한 마디를 얹었다.

"권지어른, 혹시 이 봉사한테 하실 말씀 있으신 겁니까?"

판까지 깔렸겠다 못 할 말이 무언가 싶어 유한의 손이 달달 떨렸다.

"저, 저기, 나한테 단 걸 준 사람들이어서 그런 건 아니고 이 봉사는 함께 일을 해야 하니까…. 이 봉사만 들을 필요는 없는 말이니 그냥 해도 되겠지 싶어서. …서 권지 자네도 나쁘지는 않은 사람인 것 같으니…."

'나…쁘지는 않은.'

아까는 진수를 더는 보고 싶지 않다는 사람치고는 함께 일을 해야 한다니 엄청난 발전이었다. 윤구의 생각이 꽤나 효과가 있었던 게다. 게다가 유한은 윤구에 대해서까지 거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듯 했다.

"으, 모르겠다. 실은, 난 이 봉사 같은 놈들이…."

진수가 긴장해선 그대로 얼어붙었다. 별 말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유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진수의 상상보다 더 엄청난 것이었다.

"진짜 싫어. 왠지 아나? 나는, 양반님들 하는 것들이 싫어. 비단옷이나, 그들의 행동이나, 태도나, 말투, 학식을 뽐내는 것, 그런 것들."

유한은 눈이 풀린 채로 과자 몇 개를 집어먹으며 그리 말했다.

"예? 제가 언제 권지어른 앞에서 그랬습니까?"

진수가 얼굴이 하얘져서는 되물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놈 언행이란, 생각보다 물렁해서 탈인데."

"뭐어? 물렁? 서 권지 자넨 어제 이 봉사가 내게 뭐랬는지 몰라서 그러네. 어쨌든, 결국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 아닌가. 나는 그들과 있으면 불행해지네."

유한이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뭐어, 어차피 까 보면 나오니까 말인데. 나는 서얼이거든. 지금에야 스승님 댁에 얹혀 살고 있지만."

가장 놀란 건 의외로 진수였다.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로 눈동자를 한참 굴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호, 혹시 어느 댁의…."

윤구는 갑자기 그런 반응을 보이는 진수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혹시 짐작가는 집안이라도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잡과에라도 응시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단 것은 그 부친이 꽤나 높은 자리였기 때문일 것이고, 결국 진수네 쪽과도 어떻게든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찌 됐든 그간 진수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면이었다.

"글쎄, 스승님이 알려 주셨었는데, 기억하고 싶지 않네."

"예에?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습니까?"

정말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지금 다른 집에 얹혀산다는 것은 집이나 고향을 떠나왔다는 것.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집을 나서며 받았던 상처만을 떠안았을 터. 그래서 마음에 담아 두기를 거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랬을 경우, 가장 흔한 김씨 성을 가졌다는 게 유한에겐 그나마 방어막이 돼 주었을 것이다. 윤구 역시 그럴 가능성을 어렴풋이 염두에 두고는 있었다. 그러나 어이 없다는 투로 물었던 것이다.

"자네들이 알 게 뭐야."

유한은 그것을 무시하고는 윤구나 진수가 입을 열기 전에 얼른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렇지, 그리고…. 유한이란 건 내 진짜 이름이…."

풀려 있던 유한의 눈이 갑자기 또렷해졌다. 자세도 마찬가지였다. 적막이 펼쳐졌다. 유한이 말을 하다 말고 몸을 윤구 쪽으로 내밀고 두려운 표정으로 작게 말했다.

"이, 이보게. 내가 방금 어디까지 말했는가…?"

"…."

윤구와 진수는 고개를 떨군 채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진수가 겨우 용기를 내었다. 그런 도중에도 그는 고개를 숙이고 멍하니 제 무릎을 쳐다보고 있었다.

"…절 싫어하신다고…."

"아니, 그, 그게 아니고…. 자네같은 이들이 싫다고 했지. 그리고 난 단 걸 좋아하니까 자넨 괜찮아!"

유한이 당황해서 손사래를 치며 도무지 뭘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진수가 윤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윤구는 자신 역시 알 수 없단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선 유한을 돌아보고 진수가 한 말에 몇 마디를 보탰다.

"저희가 모르는 것만 남은 것 같습니다만. 첫째, 권지어른께서 어느 대단한 양반가의 서얼이신지. 둘째, 그래서 원래 함자는 어찌 되시는지 정도. 설마 단 거 들어가시면 생각 없이 말이 나오는 주의십니까?"

"뭐? 진짜 거기까지 얘기했었다고? 내가?"

유한은 정말로 당황한 것 같아 보였다. 그러면서도 손으론 정직하게 과자를 한 움큼 쥐곤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진수와 윤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이리 된 거지…."

유한이 얼굴을 감싸쥐었다. 진수가 예의 도을 일 때와 같이 윤구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허안 형님, 술뿐 아니라 단 음식도 위험한 거였습니까?"

"으응…. 경우에 따라선…?"

"그보다 원래 성함이 아니라니. 알고 계셨습니까?"

진짜 이름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잠깐이긴 하지만 숨이 멎을 뻔했던 진수와 달리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윤구였다. 진수가 살짝 의심스런 표정을 하자 윤구가 슬쩍 웃어 보였다.

"응…. 다시 생각해 보니 나도 김 권지라고만 들었지 함자는 모르고 있었네."

"그러고 보니, 형님 이분과 완전히 초면이신 것 같은데 따로 이야기를 대체 어디서 들으셨던 겁니까?"

진수가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은 표정을 하고는 또 한 번 작게 말했다.


*


그 날 오후의 일이었다. 도을이 입격자 다섯을 불러모아 주막으로 향하기 전. 서윤구는 초조한 표정으로 청사로 향했다. 꽤나 이른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삼력관 원구연은 청사 안에 있었다. 구연으로부터 거기에 있을 것이라 들었으니 헤맬 것도 없었다.

"왔나! 그래서 결과는? 자네 예상대론가?"

"그랬으면 참 좋았겠지만, 아닙니다."

윤구는 기쁜 것도 실망한 것도 아닌 그저 그런 표정을 하고 구연 앞에 섰다.

"표정을 보아하니 1등은 아니지만 그 자리를 가져간 자가 오랜 지기인가 보군. 기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쉬운 티도 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오래 지낸 아인 아니긴 하지만, 예. 맞습니다."

윤구가 씁쓸한 표정으로 구연의 말에 답했다. 구연이 한숨을 내뱉었다.

"나와 함께할 날을 그리도 기다려 왔을 텐데 아깝구만. 뭐 어때, 자네나 나나 앞으로 죽을 때까지 여기서 일할 텐데. 자네같이 뛰어난 인재라면 언젠간 나와 함께 일하게 되지 않겠나."

기술관들은 거의 평생에 걸친 관직 생활을 하게 된다. 관상감 관원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구연이 속한 삼력관 집단은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유의미한 목표점이었다. 능력 있는 이들, 그리고 보통은 근속 연수가 높은 이들이 이에 속했다. 다시 말하면 원구연 쪽은 예외였다. 윤구는 그런 이에게서 진심어린 위로와 칭찬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시기가 시기였기 때문일까, 윤구의 초점은 그쪽에 있지 않았다. 1등을 놓쳐 버린 데 대한 아쉬움, 진심으로 진수를 축하하고 격려해 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 저번 식년시 2등이었던 김 권지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통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불안감까지 겹쳐 왔다. 그의 인생의 끝은 지금 당장이 아니었지만, 당장 쌓여 있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에 비하면 구연의 위로는 너무 먼 미래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래, 자네가 필시 궁금해할 만한 것 중 하나를 알려 주겠네. 자네 직속 상관 될 김 권지 말이지."

윤구가 먼저 알고 있던 정보는 그런 식으로 구연에게서 얻은 정보들이었다. 진짜 이름이 아닌 걸로 밝혀진 유한이란 이름도, 삼력청에서 잡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앉아 있다는 것도, 다른 이들이 달갑게 보지 않는다는 것도, 생각보다 단순하다는 것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상한 것이 있다면…. 사적으로는 제 이름을 쓰던데 말이네. 모든 공문서에는…."

<三曆廳雜務官兼權知 金○○(삼력청 잡무관 겸 권지 김○○)>

성씨만이 적혀 있다. 서윤구가 유이수에게서 받아들어 읽게 된 상관 배치 문서에는, 전날 구연으로부터 들었던 마지막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한의 이름은 그저 비어 있었다.


*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설마 알려진 이름이 가명이었을 줄이야."

유한은 그리 말하는 윤구의 눈을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진수에게 구연과의 일을 설명하는 동안에도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았다. 윤구는 그 때쯤 서려오는 한기를 느끼곤 유한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어떻게 이 녀석의 출신을 그리 바로 안 것입니까?"

윤구가 마지못해 물었다. 하긴 상관을 앞에 가만히 세워 두고 동기끼리 떠드는 일이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그럼 모른단 말인가? 멀쩡해 보이면서 나보다 눈치없다니 심각하군. 자네가 이 봉사 말하는 걸 못 들어 봐서 그렇지."

유한의 말에 윤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1년이란 시간을 같이 보내 왔던 자신이 진수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때 진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어 말했다.

"…그. 모든 사람에게는 합당한 책무가 있다, 그것 말입니까?"

"그래! 그거 말이야. 저것 보게. 지금까지 벗으로 지내면서 그런 말 한 번도 못 들어 봤나?"

유한이 진수를 손가락으로 콕 찝어 가며 윤구에게 따져 물었다. 조금 불쾌했을 뿐 딱히 폐를 끼칠 정도로 큰 목소리는 아니었기에 나머지 둘은 그저 한숨을 내어쉴 뿐 유한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그거….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그거 아닙니까?"

"…."

윤구의 말에 유한이 당황하여 도로 입을 다물었다. 평범한 의원 가문이라는 말조차 유한에겐 점차 무서운 것이 되어 가고 있는 도중이었다.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아는 척 한 겁니까?"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로 진수가 윤구에게 물었다. 그게 유한에게 또 한 번 충격으로 다가왔다. 윤구가 진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니 뭐, 다 아는 내용 아닌가? <논어>에 있는 내용이라 다들 한 번씩은 접해 본…."

과거와 녹취재 과목은 아니었지만, 삼력관직에 결원이 생겼을 때 열리는 취재에선 <논어>나 <맹자> 중 하나를 골라 시험을 봐야 하는 일도 있었다. 물론 양반들도 공부하느라 쩔쩔 매는 경서 시험을 무려 기술관들이 벼락치기로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며, 삼력관 자리는 언제 비게 될지 모르는 자리이므로 대부분의 관원들은 생도 시절부터 조금씩 짬을 내어 이런 것들을 공부하곤 해야 했다.

"…."

유한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몰랐다는 의미일 터. 이번에는 서윤구 역시 적잖이 놀란 듯 했다.

"아니, 삼력관 안 하실 겁니까? 야망 같은 거 없으십니까?"

굳이 다시 생각해 보지 않아도 이미 삼력청에서 역 계산을 하고 있는 유한에겐 이 상황에서 참 못 할 말이었다 싶었는지 윤구는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양반 놈들 하는 건 다 싫었다니까…."

"힉."

진수가 유한에게서 묘하게 차가운 기운을 느끼고는 몸을 떨었다.

"됐어. 별 일 없을 거야. 저, 권지어른?"

"…."

"이 녀석 너무 싫어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어제 그 일은 이 봉사 말고 다른 관원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말로 단정지어진 것 아닙니까. 함께 지내 본 제가 장담하건대, 별로 양반댁 도련님 티 안 나는 아입니다. 함께 1년을 지냈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의심조차 든 적 없었습니다."

그 말이 칭찬인지 욕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며 진수가 윤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유한에게 진수를 소개하는 윤구의 말투가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이 분…. 저를 권지 어른께 팔아넘기기라도 하려는 것입니까?'

초조한 눈빛으로 자길 쳐다보는 진수를 무시한 채 윤구가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저희는 권지어른을 도울 겁니다.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려 볼 겁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당연히 못 믿으시겠지만, 저 생각보다 능력 있고 인맥도 있습니다. 물론 이 녀석은 아니지만."

"있지, 말단 신래 관원 둘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거면 내가 왜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겠나."

유한은 이미 체념한 표정이었다. 윤구의 말이 제대로 들려올 리가 없었다.

"그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시니까요. 그래서 말단 신래 관원 둘이 이와 같은 제안을 해 온 일이 있습니까? 과거를 거치지 않은 관원이라도 자기 편으로 잡아 본 일이 있습니까? 이 봉사 때와 같이 아무 트집이나 잡아서 막 쫓아내신 거 아니고요?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 하나라도 자기 편으로 두면 마음 편해지실 겁니다."

"그, 그렇다고 쳐…. 정말 도와 줄 수 있는 건가?"

누군가 도와 준다고 생각하면 힘을 낼 수 있을까. 지금껏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 스승인 정식이 그를 뒤에서 봐 왔고 유한이 힘들어할 때마다 잡아 주었지만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고 힘이 나게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유한은 한 번쯤 그들을 믿어 보기로 했다. 아까 결심한 대로 진수가 다시 얼굴을 비추기도 했고.

"그러면 경호와 저는 따로 이야기를 마치러 가 보아도 됩니까?"

"퇴청하고 해. 서 권지 자네도 말야. 원구연이가 안 기다리나?"

윤구의 물음에 유한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고작 몇 마디뿐인데…."

"사적인 이야기 아닌가?"

유한이 원래 공사를 구분하는 사람이었던가 하고 진수가 눈동자를 굴렸다. 사실은 공사를 구분하는 거라기보단 자신만 빼놓고 둘만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서글픔이었던 모양이다.


*


결국 둘의 사적인 대화는 퇴청 후에나 이루어졌다. 이전과 같이 꽤나 늦은 시각. 그나마 겨울이라 해가 짧아 이 정도일 것이다. 여름이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사실 진수는 퇴청하기를 딱히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윤구에게 이 말만은 하고 싶었다.

"저, 그래서 권지어른 함자는 알아낼 수 있는 겁니까…?"

"그래, 역시 그 이야기부터 나올 줄 알았네. 신경 쓰이나?"

윤구가 진수를 바라보며 한 번 혀를 찼다.

"…."

"자네가 아는 사람일까 봐?"

윤구의 말에 아무 답도 없던 진수가 퍼뜩 놀랐다.

"그래, 원래 그런 놈이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웬일로 그러나 했어. 그간 하나도 몰랐는데 도련님이란 걸 완전히 체감했네."

"어…. 그리 티 났습니까?"

"그래. 그런데 사실 나도 생각해 봤네만, 그건 지금 우리에게 별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네."

윤구의 말에 진수가 이해하지 못했단 듯 고개를 돌렸다.

"자네한테 있어서 지금까지의 가장 큰 과제는 권지어른과 함께 그 고생길 가득한 자리에서 빠져나오고, 남들과 비슷한 관직 생활의 길로 넘어오는 것. 그리고 그게 가능하게 하기 위해 일단은 오해를 풀고 둘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그리고 이건 이미 어떻게든 일단락되었겠지."

윤구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말했다.

"거기에서, 우리가 아는 권지어른의 함자가 진짜든 가짜든 간에,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네. 본인이 그걸 밝히는 걸 원치 않고 계속 유한이라고 불리길 원하신다면, 이미 김 권지께는 그게 자기 이름인 게지. 다들 그리 알고 계시잖나?"

진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윤구가 예상했단 듯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인간관계에 서툰 걸 감안하고 첨언하자면, 굳이 숨기는 것 없이 모든 걸 알고 있고 그래야만 절친한 사이가 되는 것이 아니네. 자네와 나도 어찌 보면 그런 사이 아닌가?"

"…그랬었지요."

"그러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네. 뭐 그분이 자네에게 나만큼이나 절친한 벗이 되겠는가. 동고동락하다 보면야 그럴 수도 있겠다마는 아직은 그저 함께 일하는 사이잖나. 그래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알게 될 것이네. 점점 이 사람에겐 나를 털어놓아도 되겠다 확신하는 거지. 결국 무엇이든 시간이 가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진수는 윤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나, 이제는 적어도 이해 하지 못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면서 점점 상대를 신용하게 되고 더 관계가 두터워지는 것인데. 이건 한참 나중의 일이고. 자네와 권지 어른 성정이면…. 별 기대는 하지 말게."

"으윽."

맞는 말이었다. 진수와 유한이 서로 그리 두터운 관계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둘의 성정도 있지만 근무일수도 나이도 유한이 훨씬 많았다. 윤구처럼 거의 비슷한 위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서로 신뢰를 쌓는 것은 중요했다. 특히 유한과 같이 이제껏 제 편이 없었던 사람에겐 더 그랬다.

언제나처럼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단 며칠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이 지나갔다. 기억나는 건 면신례와 상관들 일을 포함한 고생뿐이었다. 앞으로 생활이 어떻게 변해나갈지 감도 오지 않았다.

"허안이의 좋은 정보 하나. 앞으로가 막막할 때는 과거 공부를 다시 하자! 일할 때 필요하기 때문에 그 책들로 시험을 봤을 것 아닌가? 그러니 오늘부터 다시 그 책들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자고."

"저, 실제 사용되는 내용이라면 과거가 아니라 취재 공부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 웬일이야, 자네가."

"그야 허안 형님께서 이상하게 과거 공부에 집착하셨던 거죠. 그 날 아침에도 그러셨잖습니까."

윤구는 진수가 자길 깨워 주던 그 날 아침을 생각했다. 분명 만약을 대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복시가 있던 다음 날 공부를 해서 뭘 하려 했던 거였는지 그는 이미 다 잊어버렸다. 닥치는 대로 서책을 챙겨 읽었던 기억은 있지만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방금 진수에게 말했던 대로 막막해서였을까. 거기서 나와서 막막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해소되었던 걸까.

결과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제 일은 잘 끝났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잘 끝난 것은 자기 일뿐이었다. 벗인 진수는 오히려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렸다. 게다가 그 문제는 달랐다. 무작정 공부하는 걸로 마음을 달래며 기다려서는 변하는 상황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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