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壹_上

서운관측후일지

프롤로그부터 새로 쓰고 있으니 읽어주세요!

리뉴얼 업데이트 현황: 프롤로그 ● / 에피소드 1 ○○ / 에피소드 2 ○○


아무 인적도 느껴지지 않는 곳, 가파른 산줄기 가운데 뿌연 안개가 자신을 둘러싼 곳에 그는 혼자 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채로 새하얀 꽃이 가득 핀 나무에 홀로 기대어 눈을 감는다.

"듣고 있나? 시간 한 번 빠르군, 벌써 내가 여기 들어온 지 십 년 넘게 흘렀단 말인가."

가장 높은 나뭇가지로부터 아주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려온다. 눈물이 날 것마냥 다정하다…. 적막과 어둠 속에서 그는 무어라 속삭인다. 목소리는 입을 떠나자마자 안개에 흩어졌다. 부드러운 소리로 대답이 들린다.

"과거 시험 말인가? 당연히 보았지. 십 년이 넘었으니, 세 번은 봤겠지. 허나 처음 한 번을 제외하고는, 복시까지는 가지도 못했지."

온 세상이 그저 하얗기만 하다. 흩어지는 자신의 목소리와 달리 들려오는 소리는 이상할 만치 선명하다.

"그러니 내 별 일 없다면, 이번이 네 번째가 되겠구만. 아, 그렇지. 자네는 시험 잘 보았는가?"

마지막 물음에서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진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뜬다. 그리고 일어선다. 눈을 떠도 스러지지 않는 어둠, 그리고 안개 속에 그는 그저 혼자이다. 방금 전까지 기대어 있던 나무를 돌아본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휘감는다. 가지 가득 피어 있는 꽃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흩뿌려진다. 꽃잎들은 천천히 원을 그리며 떨어지다가, 그의 표정 위에 겹겹이 쌓인다. 아주 잔잔하게 꽃잎들은 말을 걸어 온다.

"나 말이야, 이제 와서 노력한다고 할 수 있을 리가 없네."

"굳이 과거를 거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은 있고, 돈 벌 구실은 있으니,"

"그냥 포기해 버릴까, 하하. 농일세."

자신과 그 목소리의 주인에 대해 어떤 것도 떠올리지 못했던 그이나, 단 한 가지 기억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 해, 매화꽃이 지기 시작하던 이른 봄, 그 분은 틈만 나면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


"형님, 허안 형님! 그만 일어나십시오."

그는 그제서야 겨우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급한 외침에 눈을 뜨고 멍한 표정으로 방금 자기를 깨운 이를 바라보는 것은 관상감 천문학 생도 서윤구(徐輪球)로, 허안(虛眼)은 그의 호였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같은 생도로서 함께 수학하는 사이인 이진수(李珍秀)였다. 진수는 이제 관상감 생도로 입속한 지 1년 반이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작년 가을 초시를 치렀을 때 음양과 천문학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이들 중 가장 생도로 있었던 날수가 적은 아이였다.

해가 바뀐 지 이제 한 달이 지났다. 자신은 이제 스무 살이 되었고, 진수는 열아홉이 되었다. 달리 거둔 것 없이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었다는 건 윤구에게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 유일하게 무언가 이루었다 할 만한 것은 초시를 좋은 성적으로, 그것도 평소 함께 어울리던 생도들과 함께 통과하여 며칠 전의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생도들 중에는 진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둘 다 이제 막 생애 첫 과거를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복시 응시 인원인 열 명의 딱 절반, 다섯 명 안에 드는 것이 입격과 낙방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집합 시각이 거의 다 됐습니다."

어느새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윤구를 진수는 흔들어 깨웠다.
그런다고 별 차이는 없었지만.

"…아, 그래. 오늘이었지. 그래서였구만."

"그래서라니요?"

기운 없는 혼잣말에 진수가 반문했다.

"꿈 말이네."

꿈에 그 분이 나온 이유. 과거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던 이유. 딱 지금과 같은 초봄, 붉은빛의 꽃잎들이 한 장 두 장 떨어져 내리던 때에 나누었던 대화인 이유. 처음으로 본 과거시험이라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여기에 지나치게 힘을 쏟았던가 싶었다. 인생이 걸린 일이니 그러는 게 당연했다.

"꿈이라니요. 무슨 이야길 하십니까? 주위를 좀 보십시오. 여기가 어디로 보이십니까."

"응?"

진수의 말에 윤구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청사 뒤편의 행랑채로, 일반적으로는 야간 입직을 하는 이들의 숙소가 부족해지면 숙소로 사용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잡다한 것을 두는 창고로도 사용하는 곳이었지만, 평소 그가 수업을 마치고 부족한 것을 따로 공부하기 위해 자주 오는 곳이었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기억해냈다. 전날은 모든 시험 과정을 마친 지 만 하루가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이기지 못할 어떠한 초조함과 죄책감을 가지고 홀로 걷고 있었다. 그리고는 과거를 준비하면서 평소 그랬던 것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 혼이 빠진 사람처럼 이끌리듯 이 곳으로 빨려들어왔던 것이다.

"또 여기서 밤을 새신 겁니까."

"그, 그렇게 되었네."

윤구가 머리를 긁적였다.

"시험은 그제 부로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그리 공부를 더 하고 싶으셨습니까."

윤구의 속사정에 대해 아무 것도 알 리 없는 진수가 그렇게 쏘아붙였다. 평소답지 않게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글쎄. 뭐든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입격했다면 바로 다음 취재에 응시해야 하니 그걸 미리 대비한다는 의미가 있겠지. 만약 낙방했다면 다음 과거를 대비해야 하는 것이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그저 정신을 차려 보니 그곳이었을 뿐이다.

"며칠쯤은 쉬셔도 되잖습니까. 게다가 형님께선 관상감 생도들 중 부동의 1위입니다. 이제까지 해 왔던 모든 평가에서 항상 우수한 성적을 내셨는데, 낙방을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진수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낙방을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진수의 말에는 신경 쓰이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이보게, 그 부동의 1위라는 성적은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나."

"그, 그렇군요."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다른 이들이 하루를 반 시진(1시간), 그러니까 초시와 정시(한 시진을 절반으로 나누어 하루를 24등분한 것) 정도로만 쪼개 쓸 때 하루를 일각(약 15분으로 하루의 1/100에 해당) 단위로 쪼개 쓰는 게 윤구의 주특기였다. 놀 건 다 놀면서도 틈만 생기면 책을 폈고, 가끔씩 지금과 같이 청사 뒤편 행랑채에 자리를 잡고 밤새도록 공부에 매진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자제력과 집중력, 지구력이 극도로 높은 경지에 다다른 노력가. 그것이 지금까지 그가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실력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였다.

"어쨌든 이젠 자리를 정리하십시오. 아침입니다."

진수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책과 종이를 대신 정리하며 말했다. 윤구는 이에 수긍하며 한 번 기지개를 편 뒤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지."


*


행랑채의 작은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윤구가 반쪽이 된 얼굴로 이마에 손을 얹으며 밖으로 나왔고, 그 뒤를 진수가 따랐다.

"뭐야. 이제야 나오는 겐가. 안에서 허안이 환갑 잔치까지 해 주고 나오는 줄 알았잖나."

"…."

기다리다 지친 듯 눈을 잔뜩 내리깐 표정에 팔짱까지 끼고 손가락으로는 다른 쪽 팔을 톡톡 건드리고 있는 이의 이름은 이도을(李到乙). 올해 스물다섯으로 생도들 가운데에서는 나이가 많은 편에 속했다. 도을 말고도 다른 두 명이 더 서 있었는데, 모두 같은 관상감 생도의 복식을 하고 있었다.

"하하, 그야 이 생도 성정을 보면 그럴 만 하지 않습니까. 그게 불만이시면 직접 들어가 보셨어야지요."

도을의 옆에서 이리 말하는 이가 김효민(金孝珉). 나이는 스물셋으로, 외모로 말하자면 다정하며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에 왼쪽 눈 아래에 점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효민의 옆에서 말 없이 도을의 눈치를 살피기만 하는 이가 유지함(劉志含)으로, 효민과 동갑인 스물셋이었다.

"저, 다 모이셨으니 된 것 아닙니까…?"

진수가 도을을 똑바로 올려다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을은 진수의 시선에 당황하며 몇 번 헛기침을 하다 애써 웃으면서 팔짱을 풀었다.

이래 봬도 이들 다섯 명이 천문생들 중 가장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는 자들이었다. 진수는 상대적으로 불안정하게 5등과 6등을 계속 오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번 시험의 입격자 중 한 명으로 유력하게 꼽히는 아이였다.

"후, 그래그래. 서 생도가 걱정되었던 것 뿐이네."

윤구가 그런 도을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저 때문에…."

"아닐세. 지금 같은 시기라면야 누구든 그럴 수 있지. 저기 있는 이 생도도 아까 전까지만 해도 손발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네."

먼저 제 갈 길을 가려고 발을 옮기는 진수 쪽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도을은 입가에 한껏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었는지 진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당황스런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며 손을 저었다.

"일단은, 방 교수 나으리께서 이번 과거에 응시했던 모든 생도들은 사초(오전 9시) 전까지 간의대 앞으로 모이라고 하셨으니, 슬슬 그리로 가는 게 좋겠네만."

"그래야겠지요."

다른 이들이 도을의 말에 대답하는 가운데, 진수만이 혼자 뺨에 붉은 빛을 머금은 채 초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며칠 전에 치른 과거 시험의 결과가 오늘 당장 나올 거라는 예상 탓일 터. 그 모습을 보고는 윤구가 한 마디 했다.

"저것 보십시오, 자기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는 아이에게 제가 걱정된다며 들어가 보라 하셨다니 다들 너무하셨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잊어버리라 하는 게지. 뭐, 다 지나고 보면 나한테 안겨서는 울면서 고마워하는 거 아닌가 몰라."

그 말을 듣고 진수가 휙 돌아보고는 대답했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도을을 향한 진수의 표정에는 초조함이 아닌 단호함만이 남아 있었다.


*


간의대는 윤구가 있던 장소로부터 멀지 않은 청사 앞 뜰에 위치하고 있어 진수 일행은 제시각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몇몇이 미리 와 있긴 했으나 진수 일행이 맨 마지막으로 온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안심하고 평소와 같이 제 자리를 찾아 줄을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문학 생도 마흔 명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중요한 자리여서 그런지 특별히 늦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되자 청사 바깥문이 서서히 열리며, 길다란 두루마리 몇 개를 가지고 교수 방정식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생도들 앞에 섰다.

"흠흠. 그래. 우선은 우리 복시 응시생들 열 명은 이 앞으로 나와 보게.''

정식의 말에 윤구와 진수를 포함한 열 명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도을, 효민, 지함도 마찬가지였다. 다섯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생도 시절 어떤 과목에서든 항상 같은 이름이 1등에서 5등까지에 몰려 있는 것도 그 동안 꽤나 압박이었는데, 그 다섯이 서로 절친해 실제로 몰려다니기까지 하니 자연히 다른 이들은 그 옆에서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다들 지난 이틀 밤, 잘들 잤는가?"

정식이 그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

정식의 한 마디에 윤구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떨어졌다. 옆에 있는 다른 이들도 다를 것은 없었다. 입격이냐 낙방이냐 그 가능성은 절반이었다.

"허허, 그렇겠지. 맨정신으로 요 며칠을 보내기 힘들었을 것이네."

정식은 마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윤구 쪽으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밤 공부는 좋다만, 그 동안만큼은 좀 쉬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야."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나 정식의 그 말이 누구를 염두에 둔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몇몇은 웃거나, 윤구의 학구열에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으나, 앞에 나온 생도들 대부분은 그렇게 공부를 하는 이가 있는 와중에 자신의 실력은 얼마나 낮게 평가되었을까 하는 걱정스러움을 표하는 것이었다.
그 소란을 깨는 듯이 낮고 무겁게 정식의 발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상황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정식이 생도들을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른 의미도 있겠지만 어찌됐든 긴장하라는 뜻이었다. 정식이 눈길을 두루마리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옮기자, 생도들의 시선 역시 따라 움직였다.

"결과가 상당히 재미나더군."

정식이 입을 열었다. 그말이 끝나자마자 이제까지 없던 정도의 적막이 펼쳐졌다.


*


그 적막은 여태까지 초조함을 겨우 내리누르고 있었던 진수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숨소리는 물론이고, 심장 소리까지 이리도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진수는 심호흡을 하며,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겉으로 어떤 내색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저는 돌아가야 합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진수는 생각했다. 2년 전 맨눈으로 봐 줄 수 없을 정도로 거지꼴을 하고는 무작정 정식을 찾아가 했던 말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정도로 제멋대로 집을 뛰쳐나왔기에, 당장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면 포기해야 할 자신의 꿈에 대해서.

생도 마흔 명 중, 이름이 불리는 것은 고작 다섯 명 뿐이다. 진수는 평소 그들 중 딱 5위 정도에 걸친, 평소 실력으로도 입격을 장담하기 어려운 애매한 성적을 내고 있었다.

'너무 긴장하지는 말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정말 나를 누르고 음양과 장원을 꿰찰지 누가 아는가?'

시험 당일, 윤구가 장난스레 건넸던 말이었다. 진수는 그 말을 한 번 더 곱씹어보았다. 사실 공부가 부족했다기보다는, 언제나 한두 번의 작은 실수를 남기는 것이 진수의 가장 큰 흠이었다. 그것만 제외하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성과를 자랑하고 있었으니.

물론 과거 시험에서 운 좋게 모든 답을 맞추어 버렸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오늘 당장 본가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아래에 그는 놓여 있었다.

"그래, 다들 결과발표 들을 준비들은 된 게지."


*


"그러면, 맨 마지막 순위부터 부르겠네. 3등."

정식이 언급한 맨 마지막 순위란 3등의 맨 마지막 순위, 즉 전체 생도들 중 딱 다섯 번째의 순위에 드는 성적이라는 의미였다. 진수가 만약 입격한다면, 3등으로 입격하게 될 확률이 높았기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도을."

이름이 불리자마자 도을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정식의 앞으로 나갔다. 정식은 자기 옆에 놓인 여러 두루마리 중 하나를 집어들어 살짝 펴서 도을의 것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루마리를 펼쳤다.

예조에서 임금의 지시를 받들어 관상감 생도 이도을을 음양과 천문학 3등으로 출신시킨다.

- 기묘년 모월 모일.

정식이 천천히 이 문장을 읽고는 도을의 손에 두루마리를 넘겼다. 입격했음을 증명하는 문서, 말로만 듣던 백패였다.

윤구는 정식의 말을 듣고선 제가 더 초조해진 듯 진수의 표정부터 살폈다. 2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올해가 아니고선 안 된다고 했던 이였다. 아니나다를까 진수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안타까울 뿐이었다.
허나 아직 위의 순번이 남아 있으니 걱정 놓으라며 윤구는 속으로 말을 걸었다.

"아…."

그러나 일은 진수가 생각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윗 순번이 차례로 불리었으나, 진수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3등의 나머지 순번과 2등의 가장 마지막 순위는 각각 효민과 지함에게 돌아갔다.

이대로 2등에서조차 불리지 못한다면 영영 자기 미래는 없다고, 진수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2등이 허안 형님이시라면 또 모를까.'

전에 서윤구가 농담삼아 했던 말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게 뻔하기에, 그는 그 생각을 원래부터 없었던 것인 양 묻어 버리고 말았다.

심장이 쿵, 쿵 하며 몸 전체를 잡아끌고 아래로 찍어누르는 것 같았다. 그리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온몸은 떨리고, 두 뺨은 타올랐다. 다른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바로 다음 순간이다.

"2등은…."

드디어 누군가의 이름이 불려야 할 때가 돌아왔다. 진수는 눈을 꼭 감았다. 윤구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그 채로 어떤 짧은 사색에 잠겼다. 전혀 다른 성정을 지닌 이들이었으나 그 때만큼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이것 때문입니까…?'

지금까지는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결과였다. 항상 5위 안팎을 차지했던 진수의 이름이 불리지 않은 대신, 나머지 셋의 순위가 한 단계씩 내려간 것을 제외하고는 평소의 실적과 비슷했다.

'결과가 상당히 재미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나머지 둘 중 평소와 다른 성적을 낸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이제까지의 결과로 확실해졌다. 남은 것은 그 평소와 다른 결과를 낸 사람이, 한 명인지 혹은 두 명인지에 달렸다. 여태껏 입속한 직후의 몇 번을 제외하고는 항상 1위를 차지해 온 서윤구와, 한두 개의 실수 탓에 항상 안정적인 합격선이라 하기엔 애매한 5위나 6위 정도의 성적만을 내 왔던 이진수.

불릴 이름은 다 불렸다. 그런데 왜 5등과 6등 사이를 오가던 이들의 이름은 여전히 불리지 않았겠는가? 둘 중 하나가 갑작스럽게 높은 순위로 올라온 것이다. 서윤구와 유지함 사이로까지 치고 올라올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생도는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생도 이진수.'

여기까지가 거기 있는 생도들 모두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2등은, 생도 서윤구다."

"예…?"

진수의 마음이 쿵 하고 무너졌다. 설마하던 게 정말로 이루어졌을 것인가?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옛말이 있다. 인생의 법칙 중 하나라 불릴 만한 것이지만, 지금까지의 진수에겐 생소한 법칙이었던 탓에 그는 당황스러웠다. 마치 자신이 그리 바랐기에 그렇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어쩌면 당연하게도. 정식은 다음으로 진수의 이름을 불렀다.

"다음, 생도 이진수."

"예조에서 임금의 지시를 받들어 관상감 생도 이진수를 음양과 장원으로 출신시킨다.''

정식이 나긋한 목소리로 두루마리를 읽었다.

'예?'

이는 그 해 음양과 시험을 본 이들 중, 삼학(천문학, 명과학, 지리학)을 통틀어 가장 높은 성적을 내었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아무 녹봉을 받지 못하는 권지가 아닌, 비록 체아직(정해진 녹봉이 없이 6개월마다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녹봉을 지급하는 관직)이긴 하지만 녹관직인 종 8품 봉사직을 받게 됨도 포함했다.
윤구가 당황한 듯 눈썹을 올렸다.

'마, 말도 안 돼….'

분명 장난스레 내뱉었을 윤구의 말이 이렇게 사실이 되어 돌아오다니, 진수는 본인의 이름이 불리었음에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생도, 어서 나가 보시게."

옆에서 이러한 속삭임이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함께 다니던, 아니 이제는 함께 과거에 입격한 여러 형님들 중 한 분이었을 게다. 단 한 명, 자신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윤구를 뒤로 하고 진수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갔다.


*


해가 또 다시 언제나처럼 서산 위에 자리를 잡고 걸터앉아 있을 즈음이었다. 복잡하던 한양의 길들이지만 그 때부터는 조금씩 조금씩 한산해져 갔다.

"크, 모두들 모였구만, 그래. 좋아. 오늘은 정말 최고의 하루였지. 그렇지 않은가?"

도을은 함께 과거에 입격한 나머지 넷, 윤구, 진수, 효민, 도을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근처의 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의 맛이 좋은지 꽤나 붐비는 것으로 유명한 주막. 날이 날이기에 평소와 같은 낮은 평상이 아닌 안쪽 작은 방에 자리를 잡고 그야말로 그 날의 주연인 다섯 명이 모여 앉았다. 그들 앞에는 푸짐하고 다채로운 음식들과 술 몇 병이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올려져 있었다.

"…."

다만 나머지 넷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리 마음이 편해 보이지 않았다. 걱정 반 두려움 반의 무시무시한 감정들이 얼굴빛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음? 오늘 같은 날에 왜들 그러는가?"

아무도 반응해 주지 않자 도을이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오늘은…."

윤구가 대표로 말을 꺼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물론 지금까지의 저는 이런 부분에서는 형님과 가장 잘 맞았다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그럼, 그럼!"

윤구의 말을 하나도 예상치 못한 도을의 답변이었다.

"오늘은 이런 식으로 주막에 들르면 안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으, 음…?"

도을의 표정이 제대로 흐트러졌다.

"저희는, 내일 당장 입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

이제야 그 사실이 떠올랐다는 듯이 도을은 헛기침을 하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흠, 흠. 뭐, 그러면 적당히, 적당히 마시면 될 것 아닌가?"

그게 가능할 리 있냐며 나머지는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영 반응들이 좋지 않자, 도을은 한숨을 쉬며 어느샌가 다른 이들 몰래 술상 앞에서 떠나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진수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경호(鏡湖, 이진수의 호) 자네, 이런 날까지 그렇게 구석에 짱박혀 있을 텐가?"

"아, 저야 뭐…."

"오늘 같은 날 말이지. 평소라면 이해한다만. 그래, 아까는 정말로 놀랐단 말일세."


*


그게 자네의 원래 실력인가.

진수가 앞으로 나가자마자 정식이 그에게 건넨 말이었다.

"답안을 채점한 것은 당연히 내가 신임할 만한 관원들이고, 이리 이름을 부른 것은 나이지만, 여전히 이 결과에 대해 믿음이 가지 않아서 말이네."

"…."

진수의 표정은 의외로 덤덤했다. 그 순간만큼은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랬다. 바로 앞에, 이제껏 함께 수학하던, 그의 실력에 대해서라면 자신 다음으로 가장 잘 알고 있을 그의 동료들 앞에서 진수는 그렇게 대답했다.

"일전에 드렸던 말, 기억하십니까."

"무슨…?"

"입속하기 전의 일 말입니다."

그 일이 기억난다는 표시로 정식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수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성적에, 평소의 그답지 않은 행동. 정식은 그것에 어색함을 느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그는 신경 쓰지 않는 척 모임을 파했다.


*


그리도 그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으니 아무리 1년간이나 가장 가까이서 붙어 수학한 사이라도 놀랄 만 했다. 그래서인지 다들 진수의 이야기를 안주삼아 한 잔 두 잔 마시기 시작했다.

진수는 그 분위기에 지쳐 슬쩍 더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벽에 머리를 기댔다. 원하던 걸 이루었으나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제 자신의 인생은 어디로 던져질 것인가. 그는 멍하니 바닥을 응시했다. 그리 한참을 생각했다.

"하아, 역시 다들 이러실 줄 알았습니다…."

제일 많이 마시던 도을과 효민은 아예 방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보며 진수는 괴로운 표정만을 지었다. 그나마 의지하고 있던, 아니 아예 진수 자신과 같은 부류일 것이라 굳게 믿었던 지함은 밤이 늦었다 하여 석양이 검은빛에 흩어지기 전에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 온전한 정신이 붙은 채로 앉아 있는 것은 그 날 아침부터 신경이 쓰였던 윤구였다.

"흐음, 걱정 말게, 나는 누구와는 달리 자네한테 뭘 강요하진 않을 테니."

"헉!"

오늘따라 말이 없던 윤구가 어느샌가 진수 뒤로 와서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진수가 뒤돌아보니, 평소보다 훨씬 싸늘한 표정이었다.

"헌데 말해 주시게, 무슨 일이 있었나?"

"예?"

"자네 말이야. 무슨 수라도 썼나 하는 거지."

"전혀요. 형님이 모르는 수를 제가 썼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저 평소보다 실수가 적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진수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아."

윤구는 갑자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더듬거리며 상 위로 손을 뻗어 근처에 놓여 있던 물잔을 가져와 한 모금 마셨다.
그는 크게 여러 번 숨을 몰아쉬더니, 엷은 미소를 지으며 본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 분이 이런 심정이셨으려나…."

"…."

아무런 단서도, 앞뒤도 없이 윤구는 탄식만을 내어비쳤고, 진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때만큼은 제 몸뚱아리보다도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서서히 감았다.


*


"아, 그러니까, 이대로 여기에서 등청하실 겝니까!"

"으아, 그럴 리가아!"

아침 해가 밝자마자,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기를 마냥 기다리며 엎어져 있는 도을의 몸을 흔들어 깨우는 윤구였다.

"그러면 일어나십시오! 슬슬 돌아가셔야지요."

"뭐, 뭐 자네, 나보고 돌아가시라니 내가 죽었으면 좋겠는가? 후, 후흐흣…."

이른 시각, 웃음거리조차 안 될 도을의 말장난에 그를 마주보고 있던 윤구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와, 대체 그리 말씀하시는 연유가, 와…."

"재미없습니다."

짧고 억양조차 느껴지지 않는 특유의 목소리로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입을 여는 이는 다름아닌 진수였다. 둘의 말에 상처라도 받았는지 도을은 반쯤 뜨다 만 눈매로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본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는 걸 보면 아직 속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그를 향해 윤구가 혀를 찼다.

"아이고, 저런. 저렇게 도발을 해야 겨우 정신을 차리시다니. 진작에 이럴 걸 그랬습니다. 반 식경이 넘도록 깨웠는데. "

"허, 험. 미, 미안하네. 그 뭐냐, 그보다 우리 셋, 간밤에 주막에서 밤을 보낸 건가…?"

그 말에 윤구가 금방 흙 씹은 듯한 표정을 하면서, 동시에 눈썹을 잔뜩 치켜들었다.

"지금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지, 진정하게. 뭐가, 뭐가 문제인데 그러는가."

도을이 당황한 얼굴로 윤구 쪽으로 몸을 틀었다. 허나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보다 못한 진수가, 도을이 평소와 달리 저보다 눈치가 없음에 답답했는지 한 마디 했다.

"저, 여기…. 허안 형님 댁…. 입니다."

"헉."

그 말에 도을의 표정이 한껏 굳어졌다. 진수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 어제 늦은 밤에 저희 둘이서…. 혀, 형님 다리를 한 쪽씩 끌고."

진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으나, 그 말만으로도 도을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등이 따끔따끔한 기분이 들었다. 기절한 상태로 그만한 일을 겪었다는 충격에서인지 그는 겨우 정신을 되찾았다.

"음, 어, 어쨌든. 갈 채비나 하세."

"허나, 형님은 지금 관복이 없는 채 아닙니까?"

"무슨, 소리인가. 난 지금 제대로 유건에 단령을…. 헉?"

영락없는 생도 복장. 당장 어제 과거에 입격하고 백패를 받았던 일을, 도을은 한시나마 잊어버렸던 모양이었다.

"…."

방 문 쪽을 바라보며 뚱한 표정으로 있던 윤구가 도을 있는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아, 하하."

도을이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표정까지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 분, 원래는 저런 분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진수가 윤구 있는 데까지 다가가선 조용히 윤구의 귀에 대고 귓속말을 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위엄 있었던 분 아니셨습니까.''

"음, 그래서 음주라는 것이 위험한 것이네. 특히 어제 같은 날엔.''

하고 윤구도 조용히 거기에 응수했다. 조금 떨어진 데 앉아 있었던 도을에게마저 대강의 내용이 들려왔다.

'다 들린다, 다 들려.'

"그러나 지금까지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져, 도을은 말없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휴, 어쩔 수 없으니, 오늘은 제가 옷을 빌려 드리겠습니다만,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앞으로는 잊지 마십시오, 제발."

"그, 그래 주겠는가? 고맙네."

그렇게 또 다시 새로운 아침이 지나고, 그들에겐 생도로서가 아닌, 본격적으로 국가의 녹을 먹는 관원으로서의 삶이 시작되려 했던 것이었다.


*


"응? 그런 거 아니네."

"예? 아니라고요?"

다섯 명의 신입 관원들은 일제히 푸른 관복 차림의 나이 많은 사내의 말에 놀란 기색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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