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壹_下

서운관측후일지

"여, 김 권지, 창고 가서 종이 좀 가져와 보게. 오는 김에 마당도 좀 쓸어 놓고."

'예?'

이 말을 듣는 동안 진수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일이 고되다는 말을 들었어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이기 때문에. 잡일이라니. 잡일이라고? 이런 일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이 아닌 서원들이 맡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들의 명령은 유한을 향한 것이었다.

"에휴, 왜 그러십니까."

"저 되도 않는 녀석, 제 후임 생겼다고 또 어깨 펼 거 아닌가."

가시방석에 앉은 듯 발목이 따끔거렸다. 계속 이 낯설고 불편한 자리에 있었지만, 이 정도의 불편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두 삼력관은 양쪽 다 진수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였는데, 그 중 만류하는 쪽은 진수가 듣기에도 어딘가 낯익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아까 윤구가 바짝 붙어서 들어오던 그 관원과 같은 사람이었다.

*

"그분이잖나. 원 봉사 나으리! 지금이야 전함이지만, 나한텐 그렇게 부르는 것이 더 편하네."

누굽니까, 그게. 일 년 전 열여덟 살 때의, 지금보다도 조금 앳된 진수의 얼굴이 윤구를 돌아보았다. 윤구는 그 물음에 놀란 얼굴로 되물어보았었다.

"응? 아무리 자네가 사람 사귀는 데 서툴다 한대도, 그분을 모르나? 우리들한테 얼마나…. 음, 전설 같은 사람인데."

"전설이요?"

*

삼력관 원구연(元救沿).

그는 3년 전, 스물한 살의 나이에, 지금의 진수와 마찬가지로 음양과 장원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한다면 특이사항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때부터 이미 전설이라 부를 만한 걸 만들어 낸 전적이 있었던 것이다.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만….'

진수가 여전히 불편한 듯 가만히 앉아서 머리만 긁적였다. 유한은 이미 지시받은 대로 창고로 뛰어간 지 오래였다.

'따라갔어야 했나….'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유한을 따라 창고로 향하지 않았는데도, 아무도 진수를 타박하지 않았다. 심지어 윤구조차 몰래 그에게 나갔다 오라고 눈짓하지 않았다. 진수 혼자만이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은 불편한 공기가 그의 주변을 감쌌다. 결국 그는 따가움에 못 이겨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어, 어디 가나."

구연이었다. 구연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처음이라, 진수는 잔뜩 긴장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도와드리러…."

"아니아니, 갈 필요 없네. 종이 가지러 가는 건 김 권지한테 시킨 거고."

"…."

그러나 어찌 되었든 저의 직속 상관이잖습니까. 하고 목까지 올라오는 말을 진수는 애써 삼켰다. 아까는 느껴지지 않았던 서윤구의 눈짓이 느껴졌다. 그건 분명히 제발 앉아 있으라고 외치고 있었다.

"…예."

진수는 윤구 쪽을 한참 뚫어져라 보다 겨우 대답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윤구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다시 진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둘은 가만히 제 자리에서 서로를 신경쓰지 않는 척 앉아 있었다.

유한은 한 식경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다녀온 직후에는 상관들에게 종이 몇 장 가져오는 데에 뭐가 이렇게 굼뜨냐며 타박을 받았다. 유한은 곤란한 표정으로 분명 마당도 쓸고 오라고 하지 않았냐며 말대꾸를 했지만, 그게 통할 리 있는가. 당연히 나이 어린 하급 관원이 무슨 말대꾸냐는 둥, 이게 다 아랫사람이 생겨서 그런 거라는 둥 유한이 입을 열 때부터 공격을 해 댔다. 같은 삼력관인 원구연이 유한보다 나이가 더 어린데도. 애초에 그런 건 어찌 되든 상관 없고, 그저 유한을 괴롭히고 싶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걸 듣는 진수와, 그 옆의 윤구의 심정은 타들어갔다. 그 이후, 유한과 진수만이 느낄 수 있는 고된 침묵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유한은 이전과 같이 계속 종이에 무언가를 써내려가면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가끔 삼력관들은 이쪽을 쳐다보며 유한에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잡무를 시켰는데, 그는 그것을 마다하지도 못하고 퀭한 얼굴로 모두 수행해야 했다. 진수는 모든 것을 그저 옆에서 쳐다만 보고 있었다.

"…저어."

진수가 다시 유한에게 말을 붙일 수 있게 된 건 퇴청 시각이 지나서였다. 그 때가 되어서야 삼력청에 사람이 모두 빠지고, 다시 둘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햇빛은 산등성이 너머에서 낮게 그들을 비추고 있었고, 길게 드리워진 담장의 그림자는 마당 한켠을 덮고 있었다.

"아까 허안 형님께서도 일을 배우고 계시는 것 같던데."

"…."

이 말을 꺼내자 유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진수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도 시절부터 눈치없는 놈으로 통했지만 그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 내내 이 말을 해야겠다고 벼르고 있던 진수였기에,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는 언제쯤 제대로 된 일이 생기는 겁니까?"

"…."

"계속 옆에 앉아 일 하시는 거 지켜만 봤잖습니까. 도와드리는 것도 다들 못하게 하시고."

유한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지켜 보는 것? 그것만 해 주면, 그럼 되네. 아까처럼 둘만 있을 때 말벗이나 좀 해 주고. 애초에 자네한테 뭘 기대한 건 아닐세."

"아까 제가 뭘 하면 되는지 알려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고된 일이라고도 하셨지요."

진수는 목소리를 잔뜩 깔고는, 작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뭘 저한테 바란 적 없습니까? 권지어른께서 아까 말대꾸하다 윗분들께 혼쭐 나시면서 곤란해하는 것 다 봤으니, 이것 때문에 제게 뭐라 하실 분은 아니라고 믿겠습니다."

"…가게."

이 때쯤 유한은 진수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단지 허공을 향해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는 절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앞부분이 들리지 않는 말의 매듭을 지었다.

"예?"

"싫다면 나가도 좋아. 방 교수 어른께 말씀드리면 자네도 원구연이 밑에서 일할 수 있게 해 주실 거야. 결국 이 일에서 피해자는 자네니까. 오늘의 일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그리하게."

진수의 되물음에 유한은 고개를 숙인 채로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을 전부 뱉었다. 속이 시원하기는 무슨. 말을 제대로 가려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채 유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미 원 관원의 이름 앞뒤에 직함도 존칭도 넣지 않았으니 다 끝났다고 여겼다. 적어도 세 번은 생각하고 말하라고 하셨는데. 결국.

"그럼요. 부당합니다. 당연히."

"하, 하하…."

유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진수가 대답했다. 유한이 허망한 웃음을 지었다.

"부당하지요. 과거를 거친 관원에게 잡일을 시키고, 원래 맡은 일이 아닐 텐데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타박하고."

"…."

"…시간이 가면 아랫사람이 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김 권지께서 절 편하게 대하는 걸로 다들 트집 잡았던 건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 지금 나름 목숨 걸고 하는 말입니다. 이거."

목소리를 키워서는 안 되는 순간이었다. 진수는 유한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그러면서도 강한 말투로 따졌다. 유한은 진수의 말투와 행동에 놀랐지만, 이내 안심한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고맙네."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왜냐면 권지어른도 예외는 없으시니까요. 적어도 앞으로 6개월 간은 봉사 일을 해야 하는 제가 권지어른 밑에서 이러고 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며, 일개 권지가 삼력청에서 역산을 하고 있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헉!"

진수는 그제서야 제가 본 것을 전부 말했다. 오후 내내 한 것은 삼력관들끼리 오가는 말들을 전부 들은 것. 그리고 유한이 적고 있던 글의 내용을 보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짐작할 수 없었지만, 유독 몇 가지 글자의 축약형으로 추정되는 형태만이 눈에 들어왔다.


<元(원, 역원을 의미함)>
<夏至(하지)>
<五月(5월)>


유한에게 따질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당장이라도 제 눈에 옳지 못한 것이 보이면 다 말해 두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억눌려 진수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있었다. 애초에 유한의 편에 선 적 없었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싶었기도 했고.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자리가 있고, 합당한 책무가 있는 것입니다. 윗분들께 부탁드려 부당한 것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면 권지어른부터 이미 그리하셨겠죠."

유한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나는 불가능하네. 그러나 자네의 의사라면 아마 존중해 줄 거야."

그는 이미 낮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역시 이 녀석도 틀렸나.

"…그러니 자네라도 여기에서 빠져나가게."

그러나 그 이후 유한이 들은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제가 권지어른과 똑같은 상황이 아닐지는 어찌 짐작하신 겁니까? 또한 저의 정의는....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제도의 혜택을 누리는 겁니다. 잘 만든 제도라도 거기에서 한 명이라도 빠져 있으면 이미 썩어가기 시작한 것 아니겠습니까."

"…자네 설마. 혹시."

진수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더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권지어른꼐서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저는 뭘 해야 할지. 그러니 역시 저는…."

유한은 진수의 등 뒤에서, 태양이 서산 너머로 점점 사라져가며 만들어내는 마지막 광채가 부드럽게 산란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눈이 부셨다.

*

결국 유한은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발소리와 함께 윤구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이고, 지금까지 계속 여기서 기다렸나?"

윤구는 유한 쪽을 흘끗 쳐다보더니, 별 말 않고는 다시 눈길을 돌리며 진수의 등을 토닥였다.

"…아까는 미안했네. 너무 상심하지는 말구."

"아, 아닙니다."

"수고 많았어. 집에 갈 땐 같이 가세."

윤구가 진수의 등을 감싸며 슬쩍 어깨동무를 해 오자 진수가 슬쩍 유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윤구는 유한 쪽으로 정식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응…."

유한은 이미 힘이 다 빠진 모양새였다. 둘이 목례를 마치고 나란히 붙어 귀가하는 것을 보며 그는 나즈막히 한숨을 쉬었다. 그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서 있던 유한은, 풀려 버린 다리를 질질 끌고 터덜터덜 청사로 걸어갔다.

*

"왜 먼저 나오셨습니까. 어르신들 따라가지 않고요."

분명 자신 따위 개의치 말라는 의도의 말이었지만, 윤구의 입에서 나온 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응. 중요한 기밀이라 먼저 돌아가 보라 하셨네."

"기밀이라고 하셨습니까?"

진수가 윤구 쪽으로 바짝 붙어 작게 물었다. 명리학이면 몰라도, 이 바닥에서 기밀이랄 게 있는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보이는 게 전부일 터인데.

"뭘 또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나. 나는 그냥 신경 안 쓸 생각이네. 그게 그리 중요한 거였다면,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예."

그래, 언젠가는. 진수는 유한을 생각했다. 그 분 역시, 언젠가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동료로, 상관으로, 아니 사람으로 대우받을 수 있을까. 비록 자신이 어리고 서열이 낮아 다른 것은 할 수 없다 해도, 한 가지는 해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저만큼은 그분을 상관으로서 존중해 드려야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미 유한이 사람 대접 받도록 하는 일은 시작부터 불가능하지 않은가. 모든 일은 작은 실천으로부터 시작하는 법. 용기를 내기까지는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진수는 앞으로의 일로 인해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

"…호, 경호. 이보게."

오래 생각한 탓인가. 바로 옆에 있을 윤구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진수는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몇 번 절레절레 흔든 뒤 제 옆에 있는 이에게 다시 집중하였다.

"헉, 예?"

"정신차리게. 아직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아, 아닙니다."

그래서 왜 부르신 겁니까. 진수가 고개를 돌려 윤구 쪽을 바라보았다. 윤구는 이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머리를 긁적이며 뜸을 들이더니, 어느 순간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내 원래 이 말은 안 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안 하려니 양심이 찔리는구만."

윤구가 진수를 데리고 길 가장자리 쪽으로 향했다. 진수는 불안한 표정으로 따라갔지만, 이내 그리 떨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심했다. 적어도 윤구에겐 떳떳했기에.

"무슨…."

"그, 권지어른에 대한 이야기네."

윤구는 그렇게 운을 떼었다.

"그 분 생각보다 다른 분들께 미운털이 박혀 있는 것 같더라구. 나도 얼마 전까지는 그런 분이 계신지 몰랐네. 아니, 그런 이름의 자리가 존재하는지도 몰랐어. 삼력청 잡무관이라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예?"

그런 이름이었습니까. 진수는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제가 한 말, 제가 했던 생각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유한과 자신이 처한 환경이 부당하다니. 모든 이들이 제도의 수혜를 받아야 한다느니.

'제도가 변했을 수도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무튼, 그 분은 지난 식년시에서 이등을 했던 분인데, 소호(小虎, 구연의 호)어른과 비등한 실력이었다고도 들었네. 그런데 간발의 차이로 일등을 놓치셨다고 하더군."

윤구가 말을 계속 이어갔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 자리를 빼앗은 것 같아."

"그게 어찌 그렇게 됩니까."

"원래 그 사람 옆자리에서 멍이나 때리고 있을 자는 나이지 않은가. 가장 홀대받는 관원의 아래에서 다른 이들을 멈추는 것도, 거드는 것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감만을 느끼며 앉아 있어야 하는 건 나였네."

그걸 듣고 있는 진수는 점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되어 갔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네. 충분히 각오도 했고,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나름의 계획까지 짜기 시작했지. 그래, 그런데 딱 그 순간, 판관께서 주신 두루마리를 읽게 되었네."

"…."

"권지어른 옆에, 내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감마저 들었네. 그리고 그게 너무 싫었어."

윤구가 힘겹게 두 손을 뻗어 진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나머지 말을 전했다.

"이게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이네. 난 자네가 처한 그 상황에서 나올 방법을 알고 있어. 내가 자넬 도와 줄 테니…."

"…."

"…용서해 주겠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 없는 절망만이 진수의 몸을 관통했다. 윤구는 고개를 숙여 여전히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안하단 감정은 진심인 듯 보였다. 본인이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결국 저는 이리도 소인배였던 겁니까. 저라도 살 것인지, 아까의 맹세대로 권지 어른과 함께 살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니.'

그러나 그만한 다른 방법도 없었다. 진수에게도 유한과 함께 살아남을 뾰족한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자신이 살 수 있는 방법조차 그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유한의 말에 대한 진수의 대답과 같이, 윗분들께 부탁드려 구연의 아래로 들어간다 한들 일이 좋게 풀릴 리가 없었다. 윤구라면 모를까, 자신의 성정으로는 도무지 유한을 끌어낼 수도 혼자 살아남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

그래. 서윤구라면. 붙임성 없고 남들의 비위 맞추는 일도 못 하는, 한 마디로 누구에게도 좋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자신에게 이리도 친절하게 대해 주며, 일순간 생각으로 한 잘못조차도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이 분이라면.

"조금 염치없지만,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래. 뭐든 말해 보게."

진수는 제가 지금까지 해 왔던 생각을 천천히 털어놓았다. 윤구는 평소와 달리 죄책감에 휩싸여 있는 상태로 진수의 말에 힘겹게 답하고 있었고, 그 때문엔가 별 말 없이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엄청난 것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조차 잠자리에 눕기 전까지 알아채지 못한 채였다.

*

인적이 없는 어두컴컴한 밤, 일구대가 놓여진 청사 마당을 가로지르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누구라도 그 주인을 알아챌 수 있는, 차분하고 일정한 소리.

"방 교수 어른 아니십니까? 이 늦은 시간까지 아직 안 들어가셨습니까."

그 날 밤 번을 맡은 이가 일구대 위에서 정식에게 인사를 건넸다.

"…허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텐데 꼬박꼬박 인사해 주어 고맙네."

정식이 잠깐 뜸을 들이다 답했다. 그는 어딘가 걱정이 많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미 혼명(昏明)이 한참 지난 시각이므로 불행인지 다행인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어찌 교수 어르신이 지나가는 것이 뻔한데도 아는 척 않고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에구. 이렇게 어두운 시간인데 그걸 어떻게 알고 그러나. 잠깐잠깐. 어어, 인사 좋지만, 그보다도 일에 집중을 해야지. 저기 남천(南天)에 저건 뭔가. "

정식이 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관원은 화들짝 놀라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갑작스러운 변화가 있다면 보고하는 것이 당연할 터. 그러나 바라본 곳에는 어이없게도 구름만이 잔뜩 끼어 있었다.

"…아, 어르신!"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 늦게나마 뒤를 돌아보았지만, 정식의 발소리는 이미 그쪽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

"…유한아."

계단 위에서 숨죽이고 있던 유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목소리의 주인이 정식임을 확인하고 반가운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정식에게 다가가 관복 자락을 꼭 잡았다. 정식은 한숨을 쉬며 그런 그를 가만히 토닥였다.

"그래, 오늘은 좀 괜찮았느냐."

그는 사적인 자리에서 어린아이를 대하듯 하는 말투로 유한을 대했다. 유한은 그저 머뭇거렸다.

"…."

"하긴. 그럴 리가 없었겠지. 네게 별일이라도 생기면 다들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 말에 유한이 목을 긁적였다.

"저, 이번에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정식이 퍽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저리도 모든 것이 서투른 녀석에게 이진수라는 패를 붙여 준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달리 나쁜 뜻이 있어서도 아니며, 특별한 - 게다가 즉각적인 - 효과를 보길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둘이 비슷한 성정을 가진 면이 있으니 어디까지나 혹시나 해서였고, 이제까지 보통 사람들 가지고 안 된 일을 조금 특이한 놈을 데려와 시도하기 위해서였고, 옆에 아무리 높아 봤자 과거를 거치지 않은 관원들만 붙여 주던 것이 이제 와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말 못할 다른 한 가지 이유.

어찌 되었든, 예상치 못한 결과에 놀라 다음 말을 잃은 채 머뭇거리는 동안 유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저 그런데."

"물어볼 거라도 있느냐."

그래. 어찌 되었든 이 아이에게는 다행인 일이겠지. 그리 생각하며 정식은 유한의 등을 쓸어넘겨 주며 자상한 말투로 대꾸했다.

"이 봉사는 혹시, 유학(儒學)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까?"

유한의 얼토당토않은 물음에 정식은 허허 웃으며 답했다.

"그 무슨 말이냐. 우리 시험과목에도 사서삼경은 있지 않니. 유한이 네가 그래서 매번 취재(取才)에서 떨어지는구나."

"그게 아니라요 스승님!"

정식이 웃으며 유한을 놀리자, 유한은 손사래를 치며 정식의 입을 막았다. 늦은 밤에 너무 소리가 커져 정식이 이를 제재해 주어야 할 정도로.

"그 녀석, 저와 마주쳤던 다른 이들과는 어딘가 다른 기운…."

여기까지 말하고 유한은 혼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막았다.

"헉…."

"왜 그러냐."

"…저 설마, 이 봉사는…."

유한은 얼마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굳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계산을 동원해서라도 방금 떠오른 생각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현재 전국을 통틀어 가장 계산이 빠른 자라 하면 그것은 필시 유한일 것이다. 그 실력은 비록 유명세를 탈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당상관들의 눈에 띄어 그 실력을 인정받을 정도는 되었다. 일개 권지에 불과하나 <내편>의 첫 부분에 여러 장에 걸쳐 나열되어 있는 수십 가지의 상수들을 포함한 각종 자료들과 지필묵을 쥐여 준 뒤 삼력청 한 구석에 묶여질 정도로 그는 쓸모 있는 놈이었다. 이름만 잡무관 인 삼력청 잡무관의 존재의의란 애초부터 그런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답을 도출해 내는 일이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진수에 대한 그의 추측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 반가의 자식입니까?"

과학(수학, 물리, 화학, 천문학)덕후/그림+글+작곡 등등 이것저것 합니다/트위터 @Owlbam_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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