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貳_上

서운관측후일지


진수는 유한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에 나와, 남중한 태양의 온기를 쬐고 있었다. 아직은 춥긴 했지만, 따뜻한 옷을 챙겨입고 손을 양쪽 소매에 찔러 넣고만 있으면 그래도 조금은 나른한 기분이 들며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그는 요며칠 간 윤구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가며 들었던 것들을 종합해 보고 있었다. 도을에 의하면 자기가 유한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유한이 처음 생도로 입속했을 때로, 6년 전이라고 했다. 그는 모든 이름 적는 난에 원래 이름이 아닌 유한(唯閑)이란 이름을 적어 냈으며, 불릴 때는 물론이고 적힐 때에도 그렇게 적혔기 때문에 도을이나 당시 생도들은 한 번도 그것이 가명이라고는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유한은 생도 시절 내내 모든 평가에서 문제를 받은 뒤 얼마 안 되어 답안을 내고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대략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이유로. 하나는 비슷한 부류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답안을 적지 못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계산 시험의 경우였다.


'일각(15분)도 지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떨리는 손으로 종이 가득 적힌 답안을 제출하면서, 저, 끝났는데, 나가도 됩니까? 그랬었지. 그 옆에 있던 자가 얼핏 봤다는데 그 답안은, 대부분 알아볼 수 없게 날려 쓴 글자들이라, 정자로 쓴 글자는 답밖에 없었다고 했네.'


그런데도 유한은 계산 시험이 있을 때마다 늘 일등을 차지했었다.

3년 전, 무슨 변고가 있었는지 계산 문제가 없는 암기 과목들까지 통달해 와, 식년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격한 유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과 같은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3년간 같이 수학했던 이들 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본인에게도 딱히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어야겠다는 의지가 없어 지금껏 윤구가 유한을 잘 몰랐던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도 했다. 잡무관이란 이름은 명목상으로, 실제로는 삼력관들을 보조하여 능력이 닿는 선에서 삼력관들의 감독 하에 그들이 맡은 일의 일부를 수행할 수 있는, 그럼에도 녹봉은 또 그것대로 못 받는 임시직이었다. 그런데 그 일부라는 것이 너무나도 애매한 단어라, 실제로 그는 전년 12월부터 당해 11월까지 그 다음 해의 책력 초본의 역산 전 과정을 수행하는 일을 혼자 맡고 있었다. 원래 열두 명이 담당하며 순번에 따라 네 조로 나뉘어 3개월씩 맡아 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유한은 부당한데다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너무도 고된 일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왜 한가로울 한 자를 굳이 이름에 집어넣으신 건지는 이해가 됩니다.'

지금의 진수처럼 밖에 나와 하릴없이 해를 쳐다보고 있을 시간도 유한에겐 없었다. 해의 위치를 구하기 위해서. 그게 이유라는 것이 모순적이었다.

그 날은 2월 초하루로, 태양의 입수(入宿)로는 경칩이 막 지난 때였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유한이 작년 초에 계산해 놓은 초본을 기초로 한 책력이 있었기에 알게 된 것. 진수는 나지막히 한숨을 쉬었다.

비록 3년밖에 지속되지 않았던 부정(不正)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 유한을 빼내 온다면 마치 모든 것이 그대로 붕괴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유한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부정은 점차 관습과 법도를 좀먹어, 유한이 잡무관 자리에서 이탈하자마자 원래 하던 대로 복귀하는 데에 드는 인력과 시간이 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렇기에 당상관들은 절대 유한을 빼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갈 수록 말이다. 빼내려면 지금이 적합했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니.

지난 달 말, 아무도 없을 때 유한에게 그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한 일이 있었다.


'어렵게도 생각했구만. 그러면 그냥 내가 계속 이 자리에 있는 편이 날 제외한 모두를 위해서는 좋은 것 아닌가?'

'글쎄요.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만, 멀리 보면 달라질 겁니다. 권지어른께서 언제까지고 여기에서 일할 수 있으실 리는 없으니까요. 제가 아는 한 권지어른을 대체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당상들이나 판관은 그제서야 부랴부랴 제도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겠지요. 그 때는 혼란도 가중될 겁니다.'

'그리 대의가 중요하다면, 이 자리에서 나, 날 죽이는 게 어떤가? 가장 확실하면서도 단순한 방법 아니야?'

진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제 목적은 권지어른을 지금 이 자리에서 빼내는 것입니다. 대의가 중요하다 한들 그저 다른 이들이 납득할 명분의 한 가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진수는 한숨을 쉬었다. 유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았었다.

'…제 목숨은 좀 소중히 여기십시오.'


목적이나 의도가 어쨌든, 윤구의 말대로 그 일은 진수와 유한 둘이서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실제로는 명분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일에 얽히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당사자 중 하나가 되어 있을 줄이야.

'이런 건 허안 형님께서 잘 아시겠지.'

다음은 윤구와 만난 뒤에 다시 생각해 보고, 이제는 슬슬 들어가야겠다 생각하며, 진수는 기지개를 쭉 폈다. 별 도움이 되지는 못했겠지만, 며칠 동안 쉼 없이 유한의 일을 돕다 보니 제대로 등허리를 편 일이 없어서인지 이곳저곳에서 뚜둑 소리가 났다. 진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경호?"

생각지도 못한 순간 들려온 윤구의 목소리에 진수의 귓가가 움찔했다. 보통은 근무 시간에 윤구와 마주칠 일 없으며, 일이 끝날 시각이 다 되어서야 문 앞에서 윤구를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게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날은 아니었다.

"허안 형님. 여긴 왜…."

"하. 다행이다. 나와 있었구만. 뭐 아니어도 밖에서 부르려고 하긴 했지만."

"무슨 일 있으십니까?"

진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에헤, 그게…."

이에 정말 걱정할 만한 일이라도 있는 듯 윤구는 뜸을 들였다.

"사실, 내가 앞으로 며칠간 자네와 함께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서 그걸 알리려고 왔네."

"헉, 예?"

걱정해야 할 사람은 윤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진수가 왼손으로 다른 쪽 소매를 감싸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독히도 길을 찾는 것을 어려워해서 누가 옆에 붙어서 목적지에 데려다 놓지 않으면 제대로 길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특히 아직 해가 완전히 길어지지 않은 지금 같은 시기에는 더욱더. 그걸 아는 윤구는 걱정스런 마음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을 안고 진수에게 이를 알려 주기 위해 찾아왔던 것이다.

"그…. 이번에 소호 나리 대신 내가 하번을 맡아, 3일간 입직하기로 되었네."

윤구가 시선을 떨구고 입을 열었다. 물론 처음 일을 배우는 과정이므로 흔히 있을, 아니 있어야 할 일이지만, 진수의 직속 상관인 유한에 대한 정보를 캐면서 그들이 알게 된 것이 있다. 유한은 밤에 번을 서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야 들었다만, 밤을 새고 나면 다음 날 온전한 정신으로 계산에 집중할 수 없는 점이 주된 이유였을 것이라고 둘은 생각했다. 그래서 결론, 진수는 앞으로 번을 설 일이 없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진수가 축 처진 목소리로 답했다.

"예…."

"후, 그리 상심할 거였으면 차라리 3년을 기다렸다 다음 번 과거를 보는 편이 좋았을 텐데. 내가 아무것도 몰랐어서…."

"그건 아닙니다."

윤구가 이마를 짚었다.

"그래, 그렇지. 이미 김 권지 어른과 알게 된 마당에, 지금 와서 이렇게 말하는 건 역시 좀 그렇겠지."

"그런 말이 아니라, 만약 그랬다면 아마 전 지금쯤 본가로 되돌아가야 했을 거라…."

진수는 슬픈 표정으로 대응했다. 지난번 그 일로부터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참이니 윤구는 진수의 입장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저 항상 제 몫을 다하고도 그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쓰러울 뿐이었다. 요즈음의 그는 언제나 피해자의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보다는, 일단 당장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래서, 집엔 혼자 갈 수 있겠나? 아니면 다른 형님들께 부탁해서 데려다 달라고 하고."

윤구가 조심스레 물었으나, 진수는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아무리 멀리 가도 설마 사대문 바깥으로까지 나가겠습니까? 도성 안에 있는 이상 어디든 가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하겠죠. 집에 말입니다…."

진수가 본가를 떠나 살고 있는 집은 산 중턱의, 마당과 바깥의 구분조차 되지 않는 단 두 칸짜리 초가였으며, 그나마도 한 칸은 아궁이 방이었다. 겨울이면 찬 바람이 문풍지를 뚫고 그냥 들어오며, 따뜻한 온돌방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날이 어느 정도 풀릴 때까지 매 해 겨울 그는 윤구네 집에서 묵고 있다가, 2월 정도가 되면 다시 초가로 돌아가곤 했다. 조건은 딱히 없었다. 어차피 두 형들의 독립으로 방은 남아나고, 의원 가문 아들인 윤구가 작고 마르고 약한데다 꺼져가는 작은 집에 사는 진수를 보다 못해 먼저 권했던 일이니까.

"그러자. 일단 내가 입직하는 동안만큼은, 자네 집에 돌아가지 말고 우리 집에서 계속 묵으시게. 아무래도, 거기보다는 우리 집 쪽이 찾아오기도 쉽고."

"그랬습니까? 별 차이 없었던 것 같은데…."

"으이구."

이에 윤구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진수의 볼을 꼬집었다. 제 집이든 진수의 임시 거처 같은 집이든 윤구가 전부 데리고 다녔으니 차이를 못 느꼈다면 전부 윤구 덕일 텐데. 반면 진수는 여전히 아무 눈치 없이 어느 쪽이 더 돌아가기에 편했는지에 대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보게, 우리 집이 얼마나 찾아오기 쉽냐 하면. 관상감을 빠져 나가서 그대로 서쪽으로 쭉 걸어가다가, 북궐이 보이면 남쪽으로 돌아서 육조거리 큰 길을 따라 내려가지…."

"거기서 이제 골목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오, 이 녀석 의외로 제대로 기억하고 있구만. 다만 정확한 길은 몰라 거기서부터는 당연히 헤맬 진수를 위해 윤구는 그 날 등청하기 전에 비장의 패를 준비해 두었다.

"적당히 내려가다 보면 내 부친께서 자넬 발견하시고 불러서 데려가실 것이네. 그러니 안심하라고."

"우와 정말 믿음직하군요."

진수가 영혼이 반쯤 나간 말투로 답했기에, 윤구로서는 그를 향한 걱정을 좀처럼 놓을 수가 없었다. 윤구는 다시 한 번 진수에게 집을 잘 찾아 돌아갈 수 있냐며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겨우겨우 세 번 정도 거듭해서 답을 받아내고 나서야 윤구는 원 관원에게로 돌아갔다.

*

일을 마친 뒤 돌아가는 길, 역시나 윤구의 우려대로 진수는 길을 잃었다. 방향만큼은 잘 잡았으나, 다른 생각에 빠져 멍하니 돌아다니다 보면 생각과 다른 곳에 있었다. 어찌 됐든 자기가 북쪽이나 동쪽으로는 간 일이 없으니 관상감의 남서쪽에 있다는 것만이 확실해져 버린 그 때, 진수는 도성을 관통하는 청계천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그제야 기억했다. 게다가 윤구의 집은 그 남쪽에 있으니, 일단 남쪽으로 가서 강가를 따라 쭉 걷기만 하면 집을 찾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다행히도, 그 때부터 그는 정신을 똑바로 차렸는지 거의 헤매지 않았다.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주위 사람들에게라도 도움을 청해야 했다.

"저…. 길 좀 물읍시다."

누가 봐도 관모에 단령, 영락없는 기술관 차림인 진수의 부탁을 듣고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예상 외로 그를 잘 도와 주었다.

"하하, 차림새를 보아하니, 이번 과거를 보러 지방에서 올라와서 입신한 겁니까? 그런데 말투가 아무래도 하삼도나 국경 쪽 사람은 아닌 것 같고, 경기…?"

"…한양, 토박이입니다…."

부끄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진수가 답했다. 이런 걸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니, 윤구네 집 근처에서 마침내 윤구의 아버지와 대면했을 때쯤엔 이미 얼굴 전체가 새빨개져 있었다.

"늦었구나."

서지원(徐地園). 본관은 달성. 서윤구의 부친으로 팔도를 통틀어 가장 유능한 의원이자, 명문가의 방계 후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인물. 윤구와 마찬가지로 훤칠한 키에 50대 중반쯤 되었을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물어보지 않으면 원래 나이를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젊어 보이는 이였다. 젊은 나이에 어의에까지 오른 바 있으며, 관직에서 내려온 후 꽤 오랫동안 일반 백성들만을 진료해 왔는데, 자신의 두 아들을 포함한 관직에 있는 어떤 이들도 감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내일은 좀 빨리 오도록 해 보자. 그리할 수 있니."

"잘 모르겠습니다."

진수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짧게 답했다. 영 확신 없어하는 눈치를 보이자, 지원이 제 팔로 진수의 어깨를 감고는 가볍게 주물러 주었다. 작게 앓는 소리를 내는 걸 보아하니 여전히 아픈 모양이었다.

"길이 단순해 금방 올 줄 알았다만. 이걸로도 이리 고생할 줄 알았다면 그냥 널 데리러 갈 걸 그랬구나. 걱정했거든."

"저, 그럴 필요까지는, 제가 이 이상 더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어르신."

"그리 폐 끼치기 싫으면, 말로만 하지 말고 어서 건강해지기나 하거라."

여태까지 고생했던 것을 보상해 주기라도 하듯, 지원은 금방 진수를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진수더러 오른쪽 끝 방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며 갈아입을 옷을 넣어 주었다. 그 방은 진수가 겨울 동안 묵기 위해 짐을 풀어 둔 방이 아니라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별도로 마련된 방으로, 중앙에 이부자리 같은 것이 넓게 펼쳐져 있고, 벽 한쪽 면이 통째로 약재 서랍으로 채워져 있는 곳이었다. 서지원의 명성 탓에 낮에는 길게 줄을 서 있어야 겨우 들어와 볼 수 있는 곳이지만, 지금과 같은 늦은 저녁부터 이른 새벽까지는 비어 있었다.

"오늘도…, 자야 합니까?"

진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윤구의 권유로 이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된 이후로 주기적으로 지원에게 검진이나 치료를 받고 있긴 했었지만, 그 날은 너무도 갑작스러워 진수는 당황한 표정을 얼굴에 잔뜩 새기고는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요즘 널 보니 아무래도 좀 더 자주 데려와서 재워야 할 것 같더구나. 일이 많이 고되니."

지원이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

"말 안 해도 안다. 기술직 일이 다 그렇지. 자, 이제 누워 봐라."

진수는 방 안에 깔린 이불에 몸을 눕혔다. 언제나 그렇듯 이 방의 이불은 눈에 띄게 포근했다. 본가에도 이런 건 없었다. 바닥이 덥혀져 오니 몸이 여태껏 머금었던 찬 기운이 천천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에 누워 몸을 이완시키자, 신경쓰이지 않았던 약재들의 냄새가 점점 코를 찔러 왔다. 그리고는 약방이란 분위기에 취해 점점 멍해져 왔다. 그렇게 잠깐 동안의 정적이 흐른 후, 지원이 약이 든 사발을 가지고 들어왔다.

"항상 궁금했는데, 그 약은 무엇입니까? 마시면 잠이 오고, 일어나면 개운한 느낌이 들고, 그간 긴장했던 게 다 잊혀지는 게 신기합니다."

그 물음에 지원이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 말대로지. 그리고, 이 약이 뭐 하는 약이냐 하면 그건…."

"…."

"비밀이다, 이 녀석아."

진수는 이 말에 따로 대꾸하지 못하고 그저 잔뜩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그럼. 자기가 뭘 처방받고 있는지 알고 싶은 건 이해한다. 당연한 권리지? 그런데, 사실 이건 윤구도 뭔지 모른다. 심지어 윤선이나 윤원이도."

윤선과 윤원은 윤구의 두 형들의 이름이었다. 동시에 현재 내의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촉망받는 인재이기까지 했다. 그걸 익히 알고 있는 진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입니까?"

"그저, 조선 제일의 의원이 가지고 있는 비기 정도로 이해해 주면 고맙겠구나. 아참, 그리고 다음 날 일어나면 개운한 기분이 드는 건, 이 약 때문은 아니다."

"예?"

"에구. 내가 괜한 말을 했나. 이건 잊어버리고, 이제 자자꾸나."

이 말을 마치고 지원은 진수의 등을 받치고 입을 벌리게 한 뒤 사발 안에 담긴 검은 액체를 남김없이 진수의 입 속에 부었다. 서서히, 천장과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현실과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

그 이후, 지원은 진수가 누워 있는 자세를 바로잡아 주고는, 이불을 덮어 주고 방을 나왔다. 달 없는 밤은 너무도 어둡고, 조용하기까지 했다. 산짐승 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으니.

'그렇게 작고 말랐기에, 양반집 아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녀석 손발을 보면, 확실히 몸으로 하는 고생이란 건 모르는 삶을 살았을 것 같긴 하다….'

그 역시 한 달 전쯤 윤구에 의해 이 사실을 처음 접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이내 진수의 이전 처방기록을 들여다보고는 납득했다.


'확실히, 내가 놓친 것들이 있었구나.'

'그렇습니까?'

기록을 정리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던 윤구가 물었다.

'음, 저 녀석은. …일반적인, …경우는 아닌 것 같다만.'

'그게, 만약 경호가 평범한 병판 대감 댁 아들이었다면 모두들 그 출신을 몰랐을 리 없잖습니까? 당연히 몰락한 양반가 사람이거나, 아니면 지방에서 올라왔거나, 그런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평범한 병판 대감 댁 아들이라니. 그 말에 지원은 기록을 정리하다 말고 허허 웃고는 윤구 쪽으로 다가가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예 신경 안 썼던 게 아니라, 네 나름대로 가설을 세웠었구나. 그럴 바에 처음부터 물어보는 편이 나았을 텐데. 지금도 네 옆 방에서 자고 있고.'

'통성명을 그런 식으로 넘긴 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윤구가 불안한 듯 손발을 만지작거렸다.

'저런. 그 이야기는 아니다. 그 때야 너나 경호나 둘 다 정신이 없었잖으냐. 내 말은 그 사이에도 분명 기회가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보다 괜찮은 게냐. 어서 가져가 먹고, 바로 누워 자거라.'

지원이 제 주머니에서 엄지손톱 크기의 납작한 환약을 꺼내 윤구의 손에 쥐어 주었다. 어떤 하얀 가루를 뭉친 모양새였다.


*

눈을 감고 있었지만, 눈앞이 눈에 띄게 밝아진 것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린 사이 다음 날 아침이 된 모양이었다. 진수는 눈꺼풀을 올려 보았다. 손발도 까딱거려 보았다.

'어제…. 뭐가 있었습니까…?'

전날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 채 진수는 방 뒷쪽 창을 열고 바깥의 경치를 보았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싶었다. 적당히 건조하고 시원한 공기,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그로 인해 생긴 선명한 그림자. 삑삑거리는 직박구리. 아직 꽃이 피기에는 일렀지만 그래도 그 준비라도 하는 듯 나무에 방울방울 맺힌 작은 겨울눈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평화롭다는 기분. 그걸 만끽하면서 진수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 앞쪽에 굳게 닫혀 있는 문 바로 안쪽 구석에는 사모와 단령이 깔끔하게 개켜져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등청 준비를 해야….'

진수는 그제서야 굵직한 일들이 생각이 났다. 직속상관인 김유한과 관련된 일들이나, 윤구나 원구연에 관한 일. 모든 것이 아주 먼 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집이 윤구네 집이었다는 것도….

"…허안 형님?"

소리를 내서 불렀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옆방에 있을 텐데.

'아, 번을 선다고 했었지요. 그러면 아예 하룻밤을…?'

유한과 함께 일하는 동안은 번을 설 수도 없고, 다른 분이 일지를 적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진수는 사실 그런 일들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게다가 나쁜 일이 있을 거란 긴장감이나 불안감 같은 것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평소보다도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갈아입고, 등청 준비를 한 다음 마당으로 발을 내딛었다.

'어….'

초상집 분위기였다. 이도을과 원구연이 문 앞에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서 있고, 따로 산다고 들었던 서윤선과 서윤원마저 돌아와서 그 부모와 함께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무엇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 순간 진수의 머릿속에 그 전날 있었던 모든 기억들이 빨려들어왔다.

"경호! 이제 일어나다니…!"

도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진수에게 달려와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흐느끼는 듯 말했다.

"밤 사이, 허안이, 하옥당했네…."

과학(수학, 물리, 화학, 천문학)덕후/그림+글+작곡 등등 이것저것 합니다/트위터 @Owlbam_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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