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貳_下

서운관측후일지

유이수는 혼자 멀찍이 떨어져 셋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원구연이나 이진수가 나름대로 믿을 만한 이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나, 세상에는 믿을 사람이라곤 없는 것이 당연한 일. 가만히 지켜보다 그 둘이 허튼 짓이라도 하려 하면 당장 달려가 저지할 생각이었다.

"…호는…비유…사실…"

그들의 목소리 또한, 아무리 낮게 깔고 이야기한들 전혀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진수의 그 말 또한, 마디마디가 잘려서 완성된 형태는 아니었지만 이수의 귀에 닿을 수 있었다. 잘려진 내용을 알아내는 일은 어렵지도 않았다. 젓가락 끝을 서로 맞추는 것은 양 눈이 온전히 제 기능을 하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대체 어쩌려고 그 이야기를 여기서 꺼내나. 그대로라면 당장 앞길이 막히는 것도 모르는 놈….'

이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맥락 상 크게 틀어지지 않았다면 이진수의 말은 이것이었다.

"서 권지의 호, '거짓 눈'이라는 뜻이 있었던 것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었습니다."

아니면 이와 뜻이 같은 비슷한 말이거나.

이수는 처음부터 이 일을 알고 있었다. 자신만 알고 있다는 것도. 알고도 제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 평소의 서윤구에게 있어서 이 사실은 그리 제약이 걸리는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작은 변수라도 본인의 계획에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선은 지켜볼 뿐이었다. 갑자기 그를 막아세우는 것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왼쪽이겠지요."

"무슨 말을 하려는 겐가."

진수의 말에 대꾸하는 서윤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진수는 이 의도를 눈치채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답했다.

"예를 들자면, 눈 앞에 보이는 게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정확히 분간할 수 없거나."

"이봉사, 그만두게."

이를 듣고 있던 구연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꿋꿋하게도 제 할 말을 이어갔다.

"혹시, 근처의 연기나 안개 따위를 구름으로 착각한 것 아닙니까."

"…."

윤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지러져 가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게다. 다행히도 구연은 나름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걸 착각했겠나. 괜한 짓 그만 하고, 우리 다른 이야기나 하자고."

"평소처럼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려던 것이었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구연이 윤구의 표정을 보고 진수를 타일렀으나, 진수는 역시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물론 이미 분위기가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아 있어, 더 이상 꺼낼래야 꺼낼 이야기도 없을 정도였지만.

"맞다, 원 관원께서는 전날 허안 형님 근처에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 때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까?"

"없었네. 근처에 있으려니, 여전히 밤에는 쌀쌀해 안쪽에서 불만 좀 피워 뒀었네만. 알지 않나? 그게 그렇게 문제될 것 있는가?"

구연은 묵묵히 진수의 질문에 답하였으나,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진수의 말을 반박하기 위함이었다.

"이젠 알겠는가. 이 일과 상관 없는 말은 더 꺼내지 않았으면 하네."

"불을 피웠다면 확실히 그 주변에 연기는…."

윤구의 표정은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이 봉사, 그렇게, 남의 치부를 들추는 게 재미있나?"

그 말투는 어딘가 차가웠다. 평소와는 다른 '이 봉사'라는 호칭도 이상했다.

"그게 무슨 말씀…. 설마, 그 왼쪽 눈을 일부러 숨기시던 거였습니까?"

진수는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좀 이상합니다…. 아마 판관 나리께서 여기를 계속 보고 계셔서 그런 겁니까?'

이수 앞에서는 격식을 지키는 척이라도 해야 나중에 뒤탈이 없다. 다들 아는 일이었다. 진수는 뒤를 슬쩍 돌아보며 이수의 눈치를 보았다. 이수가 진수를 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워낙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는 그였지만 그 때만큼은 어째선지 소름이 돋았다.

어딘가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호에 자기 눈에 대한 사실을 떡하니 박아 두었으면서, 그걸 꺼내 보이는 것을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라 여긴다는 서윤구가 이상했지만, 그러면서도 죄책감이 밀려올라왔다. 진수가 더 이상 말도, 움직임도 없이 초점 없는 눈만 휘둥그레진 채로 땅바닥을 보고 앉아 있는 것을 본 윤구가 말했다.

"내가 이런 것까지 자네가 모르고 그런 것인지 따로 묻고 넘어가 주어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네. 그래 자네는 이 상황을 겪어 본 적 없으니."

여전히 차갑고 단호한 말투였다. 그러나 그 나름대로 벗이었던 이로서 마지막 예를 지키려 했던 것이었다. 구연은 이 둘의 관계에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더 이상 그 대화에 말을 얹지 않았다.  진수 역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렇다면 이대로 이야기는 끝나겠지. 그러나 그건 너무도 헛된 희망이었을까. 진수의 목소리가 매정하게 원구연의 고막을 때렸다.

"그런데 전 이것이, 그 때 저와 비슷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제 출신이나 김 권지 나리의 원래 함자가 거론되었을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더 이야기 나눌 필요를 못 느끼겠으니, 그냥 돌아가."

잠자코 있기로 다짐했던 구연은 이내 윤구의 말에 동의하며 진수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상황은 악화될 것이다. 옆에서 누가 말리지 않으면 진수야 괜찮겠지만, 윤구 쪽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자네 먼저 들어가 보게. 그렇지…. 기다리는 사람도 있잖나. 김 권지라든지. 바쁜데 괜히 불러와서 미안하네."

구연의 마지막 문장은, 사실 서윤구에게 하는 말에 더 가까웠다. 괜히 진수를 불러와 모진 일을 당하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 구연이 진수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나머지 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무어라 중얼거리며 옥사를 빠져나갔다.

그걸 끝까지 지켜보다 진수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구연이 한숨을 쉬며 윤구의 손을 잡았다. 서윤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구연을 불렀다.

"소호 형님, 방금은…"

"…미안하네. 그저 자네의 다른 벗들은 조금 들떠 있기에, 어떤 느낌인지 알지 않나, 그래서 저 녀석을 데려온 건데 이리 될 줄은…. 아니, 이것도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

윤구는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원한다면 여기서 들은 건, 못 들은 걸로 하겠네."

"…그래 주시겠습니까."

윤구가 천천히, 작은 소리로 말하며, 구연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는지, 이수가 서 있던 자리 쪽으로 힐끔 눈을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진수와 함께 나간 듯 했다. 윤구는 유이수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를 떠올리고는 더욱 더 큰 수렁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전의 대화를 들었을 것이다. 필시 그랬다. 어쩌면 원래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서윤구가 생도로 입속하려 할 때에 유이수는 그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었다.

'의원 집안 놈이 관상감에 들어오려 하는 이유는 눈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겐가?'

그 때문인지 이수에 대한 윤구의 첫인상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편했었다. 시간이 지나고 유이수라는 인물이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야 윤구는 조금이나마 이수에게 신경을 '덜' 쓰게 되었다. 거기에서 이 일이 끝난 이유는 이수가 윤구에게 있어서 멀거나 혹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금 '이 봉사'의 말은, 당황스럽고 불쾌하기까지 했다.

"이만 가겠네."

구연이 그리 말하면서 멍하니 다른 곳을 응시하는 윤구의 오른눈 앞에 손을 휘저었다. 윤구가 금방 정신을 차리고 구연에게 말 없이 인사를 했다.

"아이구…. 그냥 일 안 한다 생각하고 편히 쉬게. 몇 대쯤은 맞을 것 같으니 마음의 준비는 하고…."

당연히 농담이었다. 위안이라기보단, 걱정만 남게 되는 농담이었지만.


*


이진수가 옥사를 빠져나올 때, 윤구의 짐작대로 이수는 진수와 합류해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조용히 걸어오다가, 관상감 청사에 거의 당도했을 무렵 진수를 붙잡고 으슥한 곳으로 그를 끌고 갔다.

"저, 저는 빨리 돌아가 보아야겠습니다."

"뭐. 김 권지한테 말인가?"

"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서 권지를 뵈러 간다고 사전에 알렸던 것도 아니고."

이수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잘 듣게, 돌아가서 김 권지한테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방금 일은 철저히 모르는 걸로 해 둬야 하네."

진수가 그제서야 놀란 눈을 했다.

"다, 다 들으셨습니까?"

"그렇게 대놓고들 말하는데 못 듣는 쪽이 이상한 거 아닌가?"

이수는 제 눈 앞에 있는 진수만에 대한 감정보다는 어딘가 인간에 대한 총체적 환멸이 느껴지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원래 알고 있었네. 몰랐을 리가 있나? 이상할 정도로 오른눈만 쓰는데다가, 가끔씩 답답한지 왼눈을 닦아내는 습관까지 있었는데."

그런 게 있었단 말입니까. 진수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이수를 쳐다보았다.

"아, 요몇 년 사이에는 좀 덜해졌지. 자네가 들어왔을 때 정도면 거의 사라져서 눈치 못 챌 만 하군. 허나, 서 권지를 처음 봤을 때에는 간단히 알아챌 수 있었거든."

"그러면, 그리도 쉽게 누구라도 알아챌 만 한 것이라면 왜 이 일을 함구하자는 겁니까?"

진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제서야 제 생각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을 터. 그는 방금 그가 벌인 일이 지난 달 제 신분을 들켰던, 엄밀히 말해서는 들킨 것도 아니고 그냥 논란이 되었을 뿐인, 일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여전히.

"자네는 지금 물에 빠져 죽어가는 김 권지를 구하고는 싶어하는데, 본인은 수영도 못 하면서 직접 뛰어들려고 하는구만."

진수가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 진수를 보며 이수는 혀를 찼다.

"그러니까, 자네 상관, 권지 김유한과 자네 둘이 지금 사이좋게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아 보여서 말이야. 서 권지가 멀쩡하게 보이기라도 해야 자네들이 제자리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걸세."

"무슨, 그러면 서 권지는 멀쩡하지 않은 상태라는 겁니까?"

진수는 이수의 말이 정말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투로 대꾸하였다.

"직접 보고도 그리 말하는가. 그런데, 내가 이리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일시적인 문제여야 하기 때문이네. 그래야 그자가 신용을 잃지 않고, 자네나 김 권지에게 뭐든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 잘 모르겠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놈들끼리 서로를 도울 수 없다는 걸."

"서 권지가 쓴 일지의 내용이나, 오늘 상태로 미루어 보아서는 애초부터 일시적인 문제로밖에 판단되지 않습니다."

이수가 한숨을 쉬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 건가. 아니면 자신을 놀리는 건가. 관청만 아니었으면 벌써 험한 말이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이수는 자신의 이마를 감쌌다.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는 것 아닙니다. 저와 김 권지만으로 지금의 상황을 되돌려 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서 권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말입니다. 헌데."

진수는 입술을 여러 번 만지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게 서 권지의 왼눈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애초에 당일 밤 연기가 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언젠가는 일어났을 일이네. 연기뿐인가? 다른 자극들에도 서 권지는 충분히 동요할 수 있었어. 특히 주변에 사람이 있을 법한 청사 앞뜰에서 입직하는 게 아닌가? 이번이 그 자로서는 처음으로 입직하는 거였지…. 첫날 발견된 게 차라리 다행이네. 누구나 처음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이수는 전에 없이 무서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진수는 스스로가 작아지는 걸 느꼈다. 서 권지의 동요라는 말에 그는 신경이 쓰였다.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었던가? 진수의 눈에 그는 평소 누구보다도 침착했으며, 진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이였다. 서윤구가 없었다면 그는 지금 이 곳에 있지도 않았으리라.

"이 봉사 자네가 원하는 것이 뭔가? 서 권지의 무고를 증명하려는 것이라면 자넨 틀렸네. 이미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니까. 단 뭐라도 할 수는 있을 테지. 자네 양심에 달렸겠지만."

이수는 진수의 몸을 아래에서 위로 훑었다.

"솔직히 병판 대감과 자네는 그렇게 많이 닮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어쨌든 자네 양심에 난 털이 꽤나 빽빽하고, 서 권지의 형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고 싶거나, 자네와 서 권지가 이제껏 드러내지 않아 왔던 것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지 알아보고 싶다면. 뭘 말하는 건지 이쯤 되면 알겠지? 난 자네에게 이걸 그리 추천하고 싶지는 않네만. 이만 가 보게."

진수가 이수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눈치챈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진수는 도망치듯 서둘러 이수의 앞을 떠났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니, 눈이 부셨다. 정남쪽에 태양이 와 있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러 있던 게다. 진수는 자신을 향해 비치는 그 밝은 빛을 외면하고 말았다.


*


그 날 이른 오후, 서윤구가 묶여 있는 옥사에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윤구야. 괜찮으냐."

서지원이었다. 윤구는 울음을 토해내며 떨리는 손으로 지원의 소매 끝을 잡았다.

"저런. 네게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말이다. 진작에 이걸 쥐어주고 보냈어야 하는 건데."

지원이 윤구에게 작은 천쪼가리를 건넸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건 예의 가루를 뭉친 환약이었다.

"먹고 좀 쉬거라. 지금은 세상이 다 끝날 것 같아도, 금방 지나갈 게야. 혹시 곤장 맞을 것 같으면, 덜 아프게 해 주랴?"

"괘, 괜찮습니다. 그냥, 조금만…."

곤장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윤구가 흠칫하며 지원의 손을 잡아당겼다. 두려운 표정으로. 지원이 윤구의 손을 쓸었다.

"그래, 제대로 자지도 못했을 텐데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지. 여기 물도 가져왔다."

지원이 소매에서 작은 물주머니를 꺼냈다. 윤구는 천천히 환약을 삼키고는 멍한 표정이 되어 벽에 몸을 기대었다.

"자, 잠들기 전에 밥도 좀 넣어 줄 테니 받고. 내일 아침쯤 깨어날 테니 그 떄 먹으면 될 게야."

한 끼 정도 분량을 뭉쳐서 만든, 주먹밥 형태. 지원은 윤구에게 별다른 것을 묻지 않았고, 윤구는 그것을 내심 감사히 여기는 눈치였다.

"…."

옥사 한 칸에는 서윤구 혼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비슷한 일로 끌려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두어 명 정도가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는 앉아 있었다. 지원은 주먹밥을 넘기면서 그들 때문인지 조금 주저하는 행동을 보였다. 그 공간을 훑는 시선은 서윤구가 있는 곳으로까지 다시 돌아왔다. 윤구의 눈꺼풀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지원은 점점 가라앉아 가는 윤구의 몸을 붙잡기라도 하듯 빠르게 주의를 주었다.

"아참, 조심해야 한다. 그 안에 약도 들어 있으니…."

말소리가 조금씩 줄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서윤구는 완전한 무의식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


이전과 같은 정적 속에서 진수와 유한은 일에 열중했다. 그들이 맡은 일이 단순 계산인 것은 어쩌면 다행이었다. 거기에 열중하다 보면 다른 일들은 거의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진수는 말 없이 붓을 놀렸다.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유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다 됐습니다."

"으, 응. 옆에 두고. 다음엔 이걸 검토 부탁하네."

유한으로부터 종이 뭉치를 건네받고는 진수가 한숨을 쉬었다. 한숨 소리에 유한이 돌연 얼어붙었다.

"이제 와 말씀드려 송구합니다만, 그 필체 좀 고치십시오. 가벼워 보이는 건 둘째치고라도,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싫네. 이 필체 그대로 책력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

붓글씨를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고, 한문에도 딱히 익숙하지 않아 보이는 사람의 전형적인 필체. 그러나 그 날 들어서 진수에게 거슬리는 것은 그 쪽이 아니었다. 획에 미세한 떨림 같은 게 있었다. 전까지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날따라 유한의 필체가 서윤구의 일지에 쓰여 있는 글자들의 필체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진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유한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저, 권지 어른."

"응."

유한이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제 일에 코를 박고 빠져들었다. 진수가 다시 물었다.

"지금은 입직하지 않는다 해도, 처음에는 입직해 보신 적 있으신 겁니까?"

"뭐, 그랬네."

"그 때 어떠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으신 거고 결과는 어땠는지 알 수 있습니까?"

"뭐, 뭘 그런 걸, 묻나."

유한이 귀끝까지 빨개진 채 진수로부터 눈을 돌렸다. 그 때 일이 그에겐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진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건 그가 방금 저지르고 온 민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니.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는 그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기도 했다. 비슷한 일이 전례가 되어 이번 일에 적용될 테니. 진수는 작고 부드러운 소리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유한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입을 열었다.

"하…. 그러니까, 나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거든. 처음이잖나…."

유한이 계속해서 말을 끝맺지 못하고 빙빙 돌렸다.

"결국 이상한 걸 적어내셨다는 뜻입니까. 뭐 설마 본인의 감상 같은 걸 적으신 건 아닐 테고."

진수의 말에 유한이 급기야 화들짝 놀랐다.

"아…."

진수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다행인 건 권지 어른이나 허안 형님이나 비슷한 수준의 실수를 하셨던 듯하니, 결국 무슨 벌을 받으셨는지나 말씀해 보십시오."

"…곤장 서른 대던가…?"

진수는 걱정 섞인 한숨으로 답했다.

"참고로 진짜 죽을 뻔 했네."

유한이 그리 말하면서 진수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이것 때문에 진수는 그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몰라 멍하니 유한을 바라보았다. 유한이 애써 웃었다.

"신경 쓰지 마. 나도 지금까지 살아 있지 않나."

그건 세상 만사 편하게 사시는 권지 어른이고 말입니다. 하고 속으로만 생각하며 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나 하게. 아깐 아무 말 없이 잘만 하더만. 하나도 허투루 하지 말게. 뭐 자네야 별 일 없겠지만. 이런 거 하나 틀리면, 책임은 내 몫이라니까."

유한이 툴툴거리면서 다시 제 일로 시선을 옮겼다. 이진수는 멍한 표정으로 유한의 제멋대로인 필체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윤구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는 것 자체로 유한은 힘이 쭉쭉 빠졌다. 벗이란 게 대체 무엇이길래. 자신이 일을 그르치던 그 날에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은 정식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일까. 진수의 존재가 한없이 낯설어 보였다.


*


그 날 저녁, 서지원이 진수를 제 집까지 데리고 가겠다며 기다리고 있었지만, 진수는 그걸 한사코 거절하고는 원래 살던 허름한 집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 있는 게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이제 날이 따뜻해지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꼭 찾아뵙겠습니다.'

그 표정은 한없이 어두웠고,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초봄 날씨로 그 날 저녁은 특히나 추웠다. 진수는 그 마지막 말을 할 때 지원의 눈을 피했다.

서지원은 이 일 때문인지, 그리 편치 않은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순식간에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윤구에 대한 걱정은 이미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겨우겨우 채비를 하고 관상감으로 향했다. 조금 이른 시각이었다. 원래대로였으면 서윤구는 아직 옥사에서 끌려나오지도 않았을 정도로. 그러나 그의 눈 앞에 있는 것은 도을이었다. 전날 윤구에게로 갈 때 잠깐 보았던 얼굴보다도 더 처참한 표정을 한.

"버, 벌써 오셨습니까? 헌데, 벌써라고 하기에도 그런 것이."

지원은 그 상황을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도을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눈물을 글썽였다.

"어떻게, 어찌 일이 매일같이 이렇게 악화될 수 있습니까. 여기서 더 바닥을 칠 수도 있는 겁니까?"

"같은 옥사에 있던 이가 숨을 거두었다고, 사람을 죽인 죄로 포도청에 끌려갔습니다."

도을 옆에 항상 붙어 있는 지함 역시 울먹이고 있었고. 효민은 그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진수는 아예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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