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貳_上

서운관측후일지

진수는 유한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에 나와 남중한 태양의 온기를 쬐고 있었다. 아직은 춥긴 했지만 따뜻한 옷을 챙겨입고 손을 양쪽 소매에 찔러 넣고만 있으면 그래도 조금은 나른한 기분이 들며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그는 요며칠 간 윤구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유한에 대해 들었던 것들을 종합해 보고 있었다. 유한 스스로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변 이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참고하기 위함이었다.

함께 생도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던 도을에 의하면 자기가 유한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유한이 처음 생도로 입속했을 때로, 6년 전이라고 했다. 그는 모든 이름 적는 난에 원래 이름이 아닌 유한(唯閑)이란 이름을 적어 냈으며, 불릴 때는 물론이고 적힐 때에도 그렇게 적혔기 때문에 도을이나 당시 생도들은 한 번도 그것이 가명이라고는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유한은 생도 시절 내내 모든 평가에서 문제를 받은 뒤 얼마 안 되어 답안을 내고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대략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이유로. 하나는 비슷한 부류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답안을 적지 못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계산 시험의 경우였다.


'일각(15분)도 지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떨리는 손으로 종이 가득 적힌 답안을 제출하면서, 저, 끝났는데, 나가도 됩니까? 그랬었지. 그 옆에 있던 자가 얼핏 봤다는데 그 답안은, 대부분 알아볼 수 없게 날려 쓴 글자들이라, 정자로 쓴 글자는 답밖에 없었다고 했네.'


그런데도 유한은 계산 시험이 있을 때마다 늘 일등을 차지했었다.

3년 전, 무슨 변고가 있었는지 계산 문제가 없는 암기 과목들까지 통달해 와, 식년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격한 유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과 같은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3년간 같이 수학했던 이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본인에게도 딱히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어야겠다는 의지가 없어 지금껏 윤구가 유한을 잘 몰랐던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도 했다. 잡무관이란 이름은 명목상으로, 실제로는 삼력관들을 보조하여 능력이 닿는 선에서 삼력관들의 감독 하에 그들이 맡은 일의 일부를 수행할 수 있는, 그럼에도 녹봉은 또 그것대로 못 받는 임시직이었다. 그런데 그 일부라는 것이 너무나도 애매한 단어라, 실제로 그는 전년 12월부터 당해 11월까지 그 다음 해의 책력 초본의 역산 전 과정을 수행하는 일을 혼자 맡고 있었다. 원래 다섯 명 정도가 담당하며 순번에 따라 한두 명이 3개월씩 맡아 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유한은 부당한데다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너무도 고된 일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왜 한가로울 한 자를 굳이 이름에 집어넣으셨던 건지는 이해가 됩니다.'

지금의 진수처럼 밖에 나와 하릴없이 해를 쳐다보고 있을 시간도 유한에겐 없었다. 해의 위치를 추산하기 위해서. 그게 이유라는 것이 모순적이었다.


"저어…."


며칠 전 그 일이 있고서부터 진수는 더 이상 유한에게 그가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억지로 묻지 않았다. 유한은 그걸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여러 번이나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 왔다.


"내게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는 겐가?"


유한이 불안한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가 세 번째로 이리 물었을 때에야 진수는 그 이야기에 반응을 해 주었다.


 "어차피 물어도 대답 안 해 주실 거잖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혹시 그것 때문에 불편한 것 아닌가 해서."


진수는 그야 그렇지만 이라는 말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본인 입으로 직접 들으니 그랬던 건지,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한 배신감이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누군지 알지 못하는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 따위보단, 저희끼리 서로 마음을 맞추어 가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수는 평소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밝힐 수 있었다. 자신이 평생에 걸쳐 배워 온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지만. 이미 그렇게 집을 나와 버린 상황에서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유한은 그런 진수를 그전과는 다른 눈길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유한이 진수를 신뢰하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급한 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진수는 최대한 빨리 유한과 좋은 관계를 이어 두어야 했다.

비록 3년밖에 지속되지 않았던 부정(不正)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 유한을 구해 낸다면 마치 모든 것이 그대로 붕괴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유한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부정은 점차 관습과 법도를 좀먹어, 유한이 잡무관 자리에서 이탈하자마자 원래 하던 대로 복귀하는 데에 드는 인력과 시간이 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렇기에 당상관들은 절대 유한을 그 자리에서 빼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갈 수록 말이다. 구하려면 지금이 적합했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니.

전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진수는 결국 유한에게 그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했었다.


"어렵게도 생각했구만. 그러면 그냥 내가 계속 이 자리에 있는 편이 날 제외한 모두를 위해서는 좋은 것 아닌가?"

"글쎄요.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만, 멀리 보면 달라질 겁니다. 권지어른께서 언제까지고 여기에서 일할 수 있으실 리는 없으니까요. 제가 아는 한 권지어른을 대체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당상들이나 삼력관들은 그제서야 부랴부랴 제도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겠지요. 그 때는 혼란도 가중될 겁니다."

"그리 대의가 중요하다면, 이 자리에서 나, 날 죽이는 게 어떤가? 가장 확실하면서도 단순한 방법 아니야?"

진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제 목적은 권지어른을 지금 이 자리에서 구해 내는 것입니다. 대의가 중요하다 한들 그저 다른 이들이 납득할 명분의 한 가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진수는 한숨을 쉬었다. 유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았었다.

"…제 목숨은 좀 소중히 여기십시오."


목적이나 의도가 어쨌든, 윤구의 말대로 그 일은 진수와 유한 둘이서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실제로는 명분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일에 얽히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당사자 중 하나가 되어 있을 줄이야.

'자세한 방법은 허안 형님께서 잘 아시겠지.'

다음은 윤구와 만난 뒤에 다시 생각해 보고, 이제는 슬슬 들어가야겠다 생각하며 진수는 기지개를 쭉 폈다.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며칠 동안 쉼 없이 유한의 일을 돕다 보니 제대로 등허리를 편 일이 없어서인지 이곳저곳에서 뚜둑 소리가 났다. 진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경호?"

생각지도 못한 순간 들려온 윤구의 목소리에 진수의 귓가가 움찔했다. 보통은 근무 시간에 윤구와 마주칠 일 없으며, 일이 끝날 시각이 다 되어서야 문 앞에서 윤구를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게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날은 아니었다.

"허안 형님. 여긴 왜…."

"하. 다행이다. 나와 있었구만. 뭐 아니어도 밖에서 부르려고 하긴 했지만."

"무슨 일 있으십니까?"

진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에헤, 그게…."

이에 정말 걱정할 만한 일이라도 있는 듯 윤구는 뜸을 들였다.

"자네는 아무래도 김 권지 어른 아래에 있으니, 혹시나 해서 물어보러 왔네만."

"어떤 것입니까?"

"입직 말이네."

윤구가 시선을 떨구고 입을 열었다.

입직 관원들이 수행하는 측후 업무는 모든 관원들이 돌아가면서 담당하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새로이 과거에 입격한 관원들이 있으면 일반적으로 한 달 정도의 수습 기간을 두고 직속 상관을 따라서 일을 배우게 한다. 입격자가 정해지기 전 배정된 입직 명단이 있는 경우 이를 일부러 바꾸기도 어렵다는 것이 또 한 가지 이유였다.

그러나 진수의 직속 상관인 유한에 대한 정보를 캐면서 그들이 알게 된 것이 있다. 권지 김유한은 입직을 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야 들었다만, 밤을 새고 나면 다음 날 온전한 정신으로 계산에 집중할 수 없는 점이 주된 이유였을 것이라고 둘은 생각했다.

그래서 결론, 진수가 유한과 완전히 같은 일(삼력청잡무관)을 맡은 이상 앞으로 번을 설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진수가 축 처진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럴 것 같았네. 그래서 내가 자넬 도와 주러 이리 오지 않았나."

윤구가 그런 진수를 위로했다.

"지금까지는 이에 관해 아무 언급도 없으시다가 왜 갑자기…."

"그…. 내일부터 소호 나리께서 입직하실 때 나 역시 함께 중번을 맡아 3일간 입직하기로 되었네."

으레 거치는 과정이었으므로 진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십니까."

그 날 오전에 구연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였을 터. 그래서 그제서야 진수와 유한의 일이 기억난 것일 테다.

"그게, 우리가 찾은 건 권지 김유한은 입직을 하지 않는다 뿐이잖나."

"예?"

"그러니, 자네는 여기 해당되지 않을 것 아닌가?"

진수가 표정이 살짝 밝아진 채 윤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정말입니까. 그러면 저 역시 별 일 없다면 다음 달부터는 명단에…."

"아니, 그것도 좀 애매한 게. 한 달의 수습 기간을 거치며 적어도 한 번 이상 상관과 함께 입직해 본 경험이 없으면 입직할 수 없다는 암묵적인 조항이 있을 것이네. 전례가 없을 거거든."

명시되지 않은 조항이란 것은 그리 의미 없어 보이긴 하지만, 전례가 없는 일을 시행할 때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게다가 측후 업무는 비록 모든 관원들이 번갈아 가면서 한다고 해도 중요한 일이다. 아무리 생도 시절의 실습 경험이 있다 해도 막 들어온 관원에게 함부로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걸 가지고 저를 김 권지 어른과 함께 아예 밑바닥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다."

이미 온갖 무시를 당해 온 김유한과 아예 동류로 얽혀 더는 회복할 수 없는 위치로 떨어지는 것. 그것이 진수가 말한 밑바닥의 의미였다.

"그래. 그게 제일 크지."

"그럼 저는 앞으로 어찌됩니까?"

"나나 소호 형님이 자넬 어찌 챙겨 줄 수만 있다면 6개월 안에 정상적인 관원 노릇은 할 수 있게 될 것이네. 곧 들어가 보아야 하는 게지? 하나만 대답해 주면 되네. 이 건을 소호 형님이나, 다른 어르신들께 물어 보아도 괜찮은가?"

"예."

진수는 평소 자신의 일이 윗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윤구가 그것에 대해서 따로 물어보는 것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래그래. 시간 뺏어서 미안하네. 바쁠 텐데 이만 들어가 보게."

진수 일로 일부러 윤구의 시간을 쪼갠 일인데도 불구하고 윤구는 애써 사과까지 하며 진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


진수가 미닫이문을 열자, 여전히 계산에 집중하고 있는 유한이 보였다. 유한은 조금 후에야 고개를 들어 열린 미닫이문의 틈 쪽을 기분 나쁘게 쳐다보았다.

"추우니까 빨리 닫아."

"그야 김 권지께서 항상 지금과 같이 관모를 바닥에 내던져버리시고 일을 하시니까 그렇잖습니까."

"으왓!"

유한은 부리나케 바닥을 아무렇게나 구르는 관모를 주워서 제 머리 위에 얹었다.

"하아…."

말 그대로 얹은 것이다. 유한은 그러고는 빈 종이가 꽉 찰 때까지 말 없이 쉬지 않고 일에 열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과력 마감은 4월 초였으나 이미 2월 중순이 다가오고 있는 탓이었다. 어째서 이 중요한 일을 이 분 혼자서 하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진수로서는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었기에.

유한은 여태까지 계산한 것들을 다른 종이에 깔끔하게 옮겨 적고는 그제서야 진수를 돌아보았다.

"서 권지와 이야기 나눴었나?"

"그,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유한이 멍한 표정을 하고는 오른손 검지로 문틀을 가리켰다.

"저기 다 보였네. 그림자 두 개. 자네가 이 넓은 관상감에서 알 만한 사람이 서 권지 말고 더 있겠는가."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한에게 그런 말을 들어서인지 어딘가 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었나. 중요한 이야기였나?"

중요한 이야기이긴 했다. 물론 바쁜 유한을 제쳐 두고 사담을 나누고 온 것에 죄송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그러나 유한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해 봤자 사실 자네가 일을 하든 말든 별 차이가 없는걸 - 이라며 깔볼 게 뻔했다. 유한이 진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었으니 거기에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 입직 건으로 그냥 짧게…."

"아, 하하, 그래 자네도 측후하는 데에 투입은 되겠지. 그거였구나."

유한이 대답을 피하듯 진수의 말에 슬쩍 웃어넘기며 다음 번에 쓸 종이를 꺼냈다. 진수는 그걸 빤히 쳐다보았다.

"저, 먼저 물어 놓으시고는 이러셔도 됩니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나."

그리 말하는 유한의 손놀림은 분주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김 권지께선 어쩌다 입직 명단에서 제외되신 겁니까. 녹취재에도 항상 떨어지고 수술관이나 삼력관 자리가 빌 일도 당분간 없을 걸 보면 그거라도 하셔야 먹고 사시는 것 아닙니까?"

삼력관이나 체아직 등 몇몇 자리에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관원들이 녹봉을 지급받을 방법은 돌아가면서 3일씩 입직하는 것 외에는 전혀 없었다. 유한도 이에 속했다. 맡은 직이 없이 3년째 근무하면서 한 번도 입직을 하지 않는다는 건 그 3년 동안 아무 대가 없이 일해 주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뭐, 그러니까 아직도 스승님 댁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겠나…."

유한이 말을 흐렸다. 유한의 스승이라고 한다면 교수 방정식을 일컫는다는 것을 진수는 최근에야 알았다. 

헌데 그 말은 정말로 가장 중요한 역산을 도맡아 하면서 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저 근무일수만 채우기 위해 나와 있는 다른 전함(삼력관이나 수술관 등의 관원 집단과 달리 맡은 역할이 없이 근무하고 있는 관원의 총칭)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종 8품 봉사인 이진수는 녹관직에 있으므로 앞으로 6개월간은 녹봉을 지급받는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6개월이 지난 후에는 유한과 마찬가지로 무록직 신세였다.

보다 못한 진수가 농담 삼아 말했다.

"저, 그 정도면 한 번 확 계산 틀려 버리고 여길 나가서 죽은 듯이 사시는 게 어떻습니까."

"뭐?"

순간 유한이 손에 들었던 붓과 종이를 내동댕이치고 진수를 돌아보았다. 항상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아 오던 유한이어서, 그리도 화난 표정은 처음 보았다. 심지어 진수가 양반가 자제임을 알아챈 그 날조차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조금만 잘못하면 당장 한 대쯤 칠 기세였다. 진수가 고개를 여러 번 휘저으며 변명했다.

"아 그렇지요! 그, 그러고 싶지 않으시니까 여기 계신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 말을 들은 유한은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은 듯한 얼굴로 잠깐 진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아무 것도 모르고 하는 말 같으니."

진수는 떨리는 눈빛으로 유한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향한 두려움을 읽었는지 유한은 분노를 거두곤 진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

"죽은 듯이 살라는 말, 사람한테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그리고는 다시 얼마 전으로 돌아갔다.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었다.


    *


삼력청에서 발걸음을 돌린 후 윤구는 청사로 향했다. 이전에 구연이 청사에 있었던 것을 떠올렸던 것이다.

'아무나 괜찮으니 당상관 한 분만 뵙자.'

그는 구연이나 다른 삼력관들보단 오래 근무했으며 관상감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당상들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설득하기 쉬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그들이 윤구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 준다면 그 아랫사람에게 말을 전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고 보니, 김 권지께서 저러고 계신 지 올해로 삼 년째라.'

윤구는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견습 시절부터 포함해서 관상감에서 수학한 날수가 3년은 넘으니 그간 받았던 일과력은 유한이 맡아 계산한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이었다. 둘은 육안으로 보았을 때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니 유한에게 계속해서 역 계산을 시킬 수 있었겠지만.

그간 삼력관과 당사자인 유한을 제외하고는 역서 편찬에 김유한이 동원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 책력 맨 끝에 적혀 있는 삼력 수술관 및 감인관의 명단에서 김유한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났네.'

한 사람이 모든 계산을 도맡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 틀릴 수 있다. 이건 유한의 계산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는 것과 별개의 문제였다. 그래서 원래는 역산을 여러 명이 나누어 맡게 하고, 인쇄 전 과정에 걸쳐 세 번씩이나 검산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무너진 와중에 유한의 이름은 책력에 적히지도 않는다. 그 말은 만약 완성된 책력에 오류가 있으면 그 책임을 유한이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명단의 가장 위에 올라 있는 감인관이 지게 되겠지. 그게 누구더라.

"아이고. 서 권지가 웬일인가."

청사 앞에는 두루마리 여러 개를 들고 바삐 움직이고 있는 정식이 있었다. 윤구는 정식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급히 목례를 하고는 안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정식은 천문학교수이긴 했으나 당상관은 아니었기에. 그 순간 윤구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치는 것이 있었다.

'…!'

생각났다.

지금 서윤구의 눈 앞에 있는, 교수 방정식.

그는 유한이 역산을 맡은 2년간 연속으로 일과력 감인관 명단의 가장 위에 올라와 있었다. 자신들의 일을 물어보아야 할 사람은 이 분일지도 모른다. 윤구는 용기를 내었다.

"저, 김 권지와 이 봉사 일로 어르신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정식이 놀란 얼굴로 윤구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본인들이 직접 오지 않고, 자네가?"

"제가 궁금해서 그럽니다. 김 권지께서 계산한 책력에 만약 오류가 발견된다면, 책임자는 누가 되는 겁니까?"

"아이고야. 그래 언제 거기까지 알아냈나. 하기야 이 봉사와 가장 친한 사람이 자네였으니, 그 일을 자네가 모를 리가 없겠지."

정식은 결국 바쁜 일정을 미루고 윤구와 함께 청사 안에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게끔 윤구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권지 김유한은 책력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이 맞습니까?"

"일단은 그렇지…. 밖에서 보기에 김 권지는 역서 편찬에 참여하면 안 되는 사람이잖나. 대신 그 애가 범한 오류에 대한 책임은 나와 다른 삼력관들이 지겠지. 허나 그리 된다면 다른 삼력관들이 그 애를 가만두겠는가?"

유한이 평소에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는 구연과 함께 있을 때 직접 보아 알고 있었다. 유한이 무시당할 대로 무시당하며 서리나 다모들이나 하는 잡일을 도맡아 하는 것은 정식이 삼력청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마찬가지였으나, 정식이 삼력청에 얼굴을 비추는 일은 퇴청 시각이 아니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묵인하셨던 것입니까. 김 권지와 함께 살고 계신데다가 매년 책력 감인관 명단에 일순위로 올라와 계셨던 어르신께서?"

"그들의 사정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지."

삼력관들은 유한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유한을 철저히 그들의 아래로 묶어두어야 했다. 일부러 오자를 낼 경우 유한의 목숨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고, 유한이 제 실력에 자만하여 거꾸로 그들을 위협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무시하고 웃음거리로 만들어야만 했다.

"난 그 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만 다른 이들은 속으로도 불안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그 정도야,  함께 사는 내가 잘 달랠 수 있고."

유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게 정식이라면 유한이 그런 취급을 받도록 그 자리에 넣은 것 역시 그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유한이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충분히 알고 계시다니, 혹 김 권지를 천거한 것은 어르신입니까."

"글쎄. 그렇다고 하기는 애매하네."

정식이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윤구의 말을 피하듯 다른 이야기로 돌렸다.

"물어보고자 했던 것은 이것뿐이 아니겠지. 아까 이 봉사 이야기도 하지 않았나?"

"김 권지에 대해 가장 잘 아신다고 하여…. 혹 김 권지가 입직을 하지 않는 이유가 그 분의 잡무관…,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

혹시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더 낮추며 윤구가 말했다.

"아니, 전혀. 그건 그 애의 개인적인 문제였지."

정식이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이 봉사의 수습기간 때문에 그렇다면 굳이 김 권지가 맡을 필요는 없지 않나? 자네 상관인 원구연이한테 한번 부탁해 보게. 자네들끼리 상의만 잘 되어 있다면야 당상들도 별 말 않을 테니."

수습 기간에는 입직일수에 따른 녹봉이 지급되지 않는다. 어차피 그 기간을 마쳐야 제대로 입직할 수 있으니 아무도 군소리를 하지 않았다. 조정은 최소한의 녹으로 기술관들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데 도가 튼 이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그러니 구연에게 두 사람 정도가 가서 배우게 되더라도 행정상 별 차이는 없었다.

"예.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일이 엄청나게 꼬여서."

"그건 나도 안타깝게 생각하네. 그러나 내가 모든 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기는 너무 이르지 않나."

"그리 생각하고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윤구가 정식에게 한 번 목례를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구는 실제로도 정식에게 별 감정이 없었다. 정식이 유한을 언제부터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삼력관 다섯을 대신할 수 있는 인재를 찾으라는 명이 떨어졌다면, 유한과 같은 계산 괴물을 그냥 두는 쪽이 오히려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이니 말이다.

"그래. 그럼 나도 슬슬 일어나야지."

정식이 혼잣말을 하며 조금 전의 두루마리들을 챙겼다. 정식이 보는 윤구는 유한과 관련된 일의 자세한 내막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서윤구가 삼력관인 원구연의 직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삼력관들이 유한에게 자신의 본분을 전부 맡겨 두고 실제로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로 인한 문제가 그의 벗 진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때만은 달랐다. 그의 마음은 오로지 이진수에게만 가 있는 듯했다. 이진수란 아이는 생도 시절 부동의 1위였던 윤구의 기록을 깨고 음양과 장원을 차지하고는, 원구연이 아닌 김유한 밑으로 들어가서 잡일을 하게 된 자였다. 그런 만큼 서윤구가 그에게 마음을 쏟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미안한 마음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진수의 일에 간섭함으로 인해 서윤구가 얻을 만한 감정은 이만하면 됐다 - 그뿐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이진수의 일 그리고 거기에 얽힌 모든 사실을 풀어내는 것보다도 자신의 감정을 위로받는 게 그에겐 더 중요한 것이지.'


    *


실제로 서윤구는 그랬다. 정확히 말하면, 유한과 진수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저 그들이 맡은 일을 원래대로 삼력관들에게 되돌리면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그리 되어야만 했다. 진수가 유한의 아래에서 일을 배우면서 얻는 거라고는 좋지 않은 소문들뿐일 것이다. 유한과 동류. 무시해도 될 사람이라는 딱지. 소문은 생각보다 빠르게 퍼진다. 그것이 윤구가 진수를 최대한 자주 원구연과 접촉시키려 하는 이유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비워서…."

"괜찮네. 나도 할 일이 있었거든. 자네 역시 생도 시절 1위를 놓치지 않았던 사람답게 배우는 것이 빠르지 않았나. 이 정도는 봐 줄 수 있네."

"과찬이십니다."

구연이 언급하는 할 일은 분명 예의 기밀과 관련이 있을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윤구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다. 상관들의 일에 함부로 호기심을 갖거나, 간섭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소호 형님께서 비밀리에 하시는 일은 김 권지 어른이나 경호의 일과 별 관련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서윤구의 생각이었다. 삼력관은 총 열두 명, 매년 역서 편찬의 일로 동원되는 삼력관의 수는 다섯 명이었다. 그 기밀이 삼력관들끼리만 수행하는 일이라고 해 봤자, 유한과 진수가 없어져 이전과 같이 매년 다섯 명이 차출된다 해도 아직 일곱이 더 남는다. 그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입직할 때와 다르게 당상관, 본청공사원, 삼력청공사원, 교수에 겸교수까지 동원될 것이다.

서윤구는 유한이 역서 편찬에 동원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까지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다른 것보다는 내일 일부터 이야기하지."

구연이 바로 일 이야기를 꺼냈다. 윤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저, 내일 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과학(수학, 물리, 화학, 천문학)덕후/그림+글+작곡 등등 이것저것 합니다/트위터 @Owlbam_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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壹_朔